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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곳에 낙원은

아즈

@azazelNJ

선우정아 - 도망가자

도망친 곳에 낙원은

아즈

4*30년 0*월 1*일. 다 낡은 지프차가 무너진 건물을, 그 위로 자란 검은 빛의 풀과 나무를 지나 사막으로 들어섰다.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한참을 달리다 멈춘 위치는 허허벌판에 선인장 하나. 차 문을 열고 흰색의 두터운 방호복을 입은 한 인간이 내렸다.

선인장에서 북쪽으로 열 발자국. 장갑 낀 손으로 발아래의 모래를 흩어내고 스위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굉음을 울리며 땅이 열리고 아래로 향하는 경사로가 나타났다. 차로 돌아가 운전대를 잡고 내려가자 천장의 문이 닫히고 경사로는 평평해졌다.

다시 차에서 내려 딱 사람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문으로 들어가자 방호복을 입은 머리 위로 약품이 쏟아졌다. 그제야 방호복을 벗고 실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샤워실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한참을 내려가서 도착한 하얀 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Harvest 연구소

양호열이 오늘부터 일하게 된 곳이었다.

 

그가 연구소에 취직해서 어떤 연구를 할 만큼 머리가 좋거나 관련 지식이 있냐 묻는다면 그런 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역할에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할 일은 단순했다. 실험체 관리 및 관찰. 가사 도우미나 다름없다고 양호열은 생각했다.

그 전 직장인 흥신소에 비하면 매우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연구소에 상주하며 24시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숙식 제공이 된다는 입장에서 오히려 좋았다. 물론 가장 좋았던 것은 당연히 후한 월급이었다.

그만큼 응급처치부터 신체 능력, 기계 수리, 요리까지 요구 조건이 많았지만 양호열은 모두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중 메인은 실험체에게 정을 주지 말 것. 그에게 있어 가장 탁월한 부분이었으니 합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안녕하세요, 오시는데 많이 힘드셨죠? "

" 아, 아니요. 괜찮았습니다. "

" 연구소를 세울 때 방사선 수치가 낮은 암반 지대를 1순위로 선정했더니 이런 사막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

" 그럴 수 있죠. 아무리 지하라도 도심은 이런 곳보다 상대적으로 오염되어 있을 테니까요. "

" 저희는 도심 외출을 최대한 줄이려고 채소도 여기서 자체 재배하고 있어요. "

" 그거 좋네요. 이제부터 제가 맡아야 할 대상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 있을까요? "

" 이런, 말이 길었네요. 호열씨 방은 이쪽이고 서류는 방 안에 있으니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물어봐 주세요. 담당해주실 실험체는 내일 직접 소개해 드릴게요. "

"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인사를 마치고 멀어지는 연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양호열은 문을 열었다. 침대와 책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주방과 화장실이 하나씩 있는 1인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모두 새하얀 이 공간에서 이질적인 갈색 파일철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양호열은 의자에 앉아 내용을 펼쳤다. 이름 강백호, 성별 남성, 나이 20살. 연구 주제, 방사능 면역...? 그런 게 진짜 있다고? 3*세기 극단적인 국가 갈등 및 핵전쟁 발발로 지구 전체가 방사능에 노출되었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방호복을 입고 다녀야 지상 활동이 가능했다.

이 보고서의 작성자는 호열이 믿지 못할 것을 안다는 듯이 그 아래 설명이 이어졌다. 복잡한 과학 이론 설명은 그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한마디로 현재 지상 수준 이상의 방사능 수치에도 세포가 방사선에 절단된 DNA의 복구를 이뤄낸다는 것이었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던 건가. 어찌 보면 기적과 같은 이야기에 실감이 들지 않았다. 정말 현실화한다면 일어날 논란이 몇 개이며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양호열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실험체'라는 말은, 아직 실험이 진행 중이라는 뜻이었다.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 안에는 강백호라는 실험체의 연대기가 있었다. 불의의 사정으로 연구소에 들어온 강태기 부부의 혈액에서 강한 세포 회복 현상 발견, 실험 과정에서 강백호 출산 및 산모 사망, 강백호가 14살일 때 부친인 강태기가 실험 부작용으로 사망.

아래에는 지금까지 강백호를 맡은 관리자들의 목록이 있었다. 꽤 자주 바뀐 것을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편은 아니지만 붉은 머리카락과 짙은 인상을 보면 온순한 사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양호열은 씻고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어제 자신을 안내했던 연구원이 문 앞에 있었다.

" 잘 주무셨어요? "

" 네, 덕분에. "

" 좋네요. 그럼 가볼까요. "

들어올 때 타고 왔던 엘리베이터와 다른 엘리베이터로 연구원이 안내했다. 지하 4층, 버튼을 누르자 한참을 내려가다 문이 열렸다. 새하얀 복도, 규칙적인 간격으로 배치된 조명을 지나 붉은색 팻말로 강백호라 적힌 문 앞에 도착했다.

" 이 층의 모든 문은 이 카드로 열면 되요. 그 외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여기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 줘요. "

연구원이 카드 하나를 건네며 문 왼쪽 패널을 가리켰다. 그 카드를 받아 패널에 대자 문이 열렸다. 그 짧은 순간 양호열은 무의식중에 긴장했다. 어제 본 사진 속 인상 깊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사람은 예상과 달랐다.

" 이번에 새로 온 사람이구나! "

붉은 머리의 청년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지만, 그 미소는 순수했고 눈빛은 맑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모습이 오히려 양호열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강백호씨를 담당하게 된 양호열입니다. "

" 호열이, 이름 좋다! 말 편하게 해도 돼! "

강백호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양호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악수라기보다는 흔들어대는 것에 가까웠다. 양호열은 붙잡힌 채 손을 흔들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안은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었다. 호열의 방보다 더 쾌적했으며 거실과 방 2개, 주방이 구비되어 있는 진짜 사람 사는 집을 보는 것 같았다.

" 호열씨는 하루 세 끼 식사 준비와 청소, 그리고 백호의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면 돼요. 세 달에 한 번 정기 검진이 있고, 저는 그때 다시 올 거예요. "

" 알겠습니다. "

" 그럼 이만 가볼게요. 백호야, 잘 지내. "

" 응! 다음에 봐! "

연구원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 안에는 둘만 남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는 양호열만 어색했다. 강백호는 여전히 밝은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배고파? "

" ...지금은 괜찮습니다. "

" 그래? 그럼 저기 앉아. 여기 소파 되게 편해! "

강백호가 소파를 툭툭 치며 권했다. 양호열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강백호도 그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 호열이는 어디서 왔어? "

" ...도심에서요. "

" 오, 거긴 어때? 사람 엄청 많지? "

" 뭐... 그렇죠. "

" 좋겠다. 나는 쭉 여기서만 살았거든. 엄마 아빠도 여기 있었고. "

'있었고'라는 과거형에 양호열은 어제 읽은 보고서가 떠올랐다. 하지만 강백호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 취미가 뭐야? "

" 취미? 특별한 건 없는데요. "

" 에이,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나는 농구 좋아해. 소연이가 가르쳐줬거든! "

강백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바닥에 놓인 농구공을 집어 들었다.

" 소연이요? "

" 응, 3년 전에 나한테 농구 가르쳐줬거든.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진짜 재밌어! 근데 소연이는 작년에 다른 연구소로 가서. "

농구공을 돌리던 강백호의 표정이 잠깐 흐려졌다가 이내 다시 밝아졌다.

" 여기 체육관도 있다고! 일주일에 한 번만 갈 수 있지만. 농구 할 줄 알아? "

" ...아니요. "

" 그럼 내가 가르쳐줄까? "

양호열은 대답 대신 거실을 둘러봤다. 벽에는 사진들이 몇 장 붙어 있었다. 모두 바깥 풍경이었다. 바다, 산, 들판. 강백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들.

" 저건... "

" 아, 책이나 잡지에서 오려서 붙여놨어.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들. "

강백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순간 양호열은 그 웃음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감지했다. 갈망이었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 꽤 밝네요. "

양호열이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강백호가 킥킥 웃었다.

" 오는 사람들마다 그러더라. 나도 그냥 사람인데 말이야. "

그 말에 양호열은 할 말을 잃었다. 강백호는 다시 웃으며 일어섰다.

" 배고파졌다! 요리 잘해? "

" ...그럭저럭요. "

" 좋아, 그럼 오늘은 뭐 먹을까? "

양호열은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기본적인 식재료들이 채워져 있었다.

" 뭐 먹고 싶은 거 있나요? "

" 누웃... 라면? 맛있잖아! "

양호열이 재료를 꺼내기 시작하자 강백호가 식탁에 턱을 괴고 지켜봤다.

" 호열아. "

" 네? "

" 나한테 반말해도 돼. 딱딱한 거 별로 안 좋아해. "

양호열은 손을 멈추고 강백호를 바라봤다. 스무 살. 이 사람은 평생을 이 좁은 공간에서만 살아왔을 것이다. 누구보다 바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라, 그래서 누구보다 자유로울 수 없다.

" ...그럼, 백호야. "

" 응! "

강백호가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양호열의 가슴 한구석을 움직였다.

 

-

 

 

그날 이후 양호열은 정해진 루틴대로 강백호를 돌봤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세 번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 실험실을 청소하고, 백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챙겼다.

백호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양호열을 배려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맛있다고 말했고, 양호열이 청소할 때면 자기 방은 자기가 치우겠다며 나섰다.

" 호열아, 오늘 체육관 가는 날이다! "

사흘째 되는 날, 백호가 가장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일주일에 한 번 허용되는 체육관 시간. 양호열은 백호와 함께 복도를 걸어 체육관으로 향했다. 백호의 안내를 받아 체육관에 도착해서 카드를 패널에 대고 문을 열자 농구 코트 하나가 있는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 봐봐, 여기! "

백호가 공을 집어 들고 드리블을 시작했다. 서툴지만 열정적이었다. 슛을 쏠 때마다 공이 림을 맞고 튕겨 나갔지만, 백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다.

" 소연이가 그랬어. 농구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것이라고. "

백호가 땀을 흘리며 웃었다. 양호열은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지켜봤다. 회색빛 하늘도, 검푸른 바다도 모르면서 어떻게 저렇게 태양이 자기 것이라는 듯 높이 뛰어들 수 있는 걸까.

" 호열아! 같이 하자! "

백호가 공을 던졌다. 양호열은 반사적으로 받았다.

" 나는 농구 못하는데. "

" 괜찮아, 골은 이 천재가 넣을 거니까! "

백호가 다가와 호열의 손을 잡고 코트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손은 뜨거웠다.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양호열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실험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

 

세 달이 지났다. 양호열은 어느덧 백호와의 일상에 익숙해졌다. 아침마다 백호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만들고, 점심에는 간단한 찌개, 덮밥이나 라면을, 저녁에는 백호가 요청하는 메뉴를 해주었다. 백호는 매번 맛있다고 말했고, 양호열은 그 반응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 호열아, 오늘 검진 날이지? "

백호가 소파에 앉아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 응, 오후에 연구원이 온대. "

양호열이 대답하며 설거지를 마쳤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농구공을 집어 들었다. 혼자 드리블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 그리고 오후 2시, 정확히 약속된 시간에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의료 장비가 든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 안녕하세요, 호열씨. 백호 상태는 어때요? "

" 크게 특이사항은 없어요. "

" 다행이네요. 백호야, 준비됐지? "

백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연구원은 익숙한 듯 거실 한쪽에 접혀있던 간이침대를 펼치고 장비를 세팅했다.

" 자, 여기 누워봐. "

백호가 침대에 누웠다. 연구원은 백호의 팔에서 혈액을 채취하고, 심박수와 혈압을 체크했다. 백호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양호열은 한쪽 구석에 서서 그 과정을 지켜봤다.

" 이제 채취할게. 이번 달은 채취량이 조금 많아. "

연구원의 말에 백호의 얼굴이 굳었다. 양호열은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백호는 항상 밝게 웃는 사람이었는데.

" 괜찮아. 금방 끝나. "

연구원이 백호의 등을 소독하기 시작했다. 골반 쪽 위치였다. 그제서야 양호열은 보고서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세 달에 한 번, 조혈모세포 채취. 긴 바늘이 백호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 으윽... "

백호가 이를 악물었다. 손이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관절이 하얗게 변할 만큼 세게. 양호열은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 가슴속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연구원은 묵묵히 작업을 진행했다. 백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 조금만 참아, 거의 다 됐어. "

하지만 그 '조금'은 길었다. 5분, 10분. 백호는 신음을 참으려고 애썼지만, 가끔씩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양호열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게 '정기 검진', '조혈모세포 채취'라는 것의 실체였다. 주기적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백호에게는 고통스러운 순간.

" 다 됐어. 수고했어, 백호야. "

연구원이 바늘을 빼내고 소독 거즈를 붙였다. 백호는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얼굴이 창백했다.

" 30분 정도 누워서 쉬어. 어지러울 수 있으니까. "

연구원은 채취한 샘플을 정리하고 가방에 넣었다. 양호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오늘은 좀 힘들 거예요. 저녁은 가볍게 주시고, 수분 섭취 많이 시켜주세요. "

" ...네. "

연구원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침대에 누운 백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양호열은 의자를 가져와 백호 곁에 앉았다.

" 백호야. "

" ...응. "

" 괜찮아? "

" 응, 항상 이래. "

백호가 작게 웃으려 했지만, 그 웃음은 평소처럼 밝지 않았다.

" 처음 몇 번은 진짜 무서웠어. 아빠가 옆에서 손 잡아줬는데... 지금은 혼자 해야 해서. "

백호가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근데 괜찮아. 이게 내 일이니까. 소연이도 그랬거든.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있다고. 내 세포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

양호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호는 자신이 겪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 다음에는... 손 붙잡아 줄까? "

양호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호가 눈을 뜨고 호열을 바라봤다.

" 진짜? "

" 응. "

" ...고맙다, 호열아. "

백호가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30분 후, 백호는 일어나 거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얼굴이 창백했지만 걸음걸이는 괜찮았다.

" 물 좀 줄까? "

" 응, 목말라. "

양호열이 물을 따라주자 백호가 단숨에 마셨다.

" 호열아. "

" 왜? "

" 진짜 잡아줄 거냐? "

" ...그럼. "

백호가 웃었다. 하지만 양호열의 가슴속에는 무거운 무언가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연민. 아니,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

그날 밤, 양호열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백호가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이를 악물고, 손으로 시트를 움켜쥐고, 그래도 참으려 했던 모습. 양호열은 갈색 파일철을 꺼내 맨 뒷면을 바라보았다.

'실험체 강백호는 연구소의 중요한 자산이며, 그의 세포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핵심 자료이다.'

자산. 자료.

양호열은 파일을 덮었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은 자산이 아니다. 자료도 아니다.

그냥... 강백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양호열은 자신이 위험한 선을 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험체에게 정을 주지 말 것. 그것이 이 일의 첫 번째 조건이었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양호열은 백호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다.

 

-

 

양호열은 강백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매일 마주하는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어떻게든 밝혀내야 할 것만 같았다.

양호열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관리자라는 명목이지만 실상은 가사 도우미에 가까운 그에게 연구소 데이터베이스 접근 권한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양호열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흥신소 시절 익힌 해킹 기술. 키보드를 두드리며 연구소 내부망에 침투했다. 보안이 생각보다 허술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부 인원의 해킹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파일들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강백호, 4*10년 출생. 출생 직후 산모 사망. 부친 강태기와 함께 연구소에서 성장. 5세, 첫 번째 조혈모세포 채취 시작. 7세, 언어 발달 정상, 사회성 양호. 10세, 체격 발달 우수, 신체 능력 평균 이상. 14세, 부친 사망. 이후 전담 관리자 제도 도입.

 

기록은 담담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양호열은 다른 파일을 열었다. 관리자 교체 기록.

 

1차 관리자, 재직 기간 8개월. 교체 사유: 실험체와의 과도한 친밀감 형성으로 업무 수행에 지장. 비고: 실험체가 관리자에게 강한 애착을 보임. 이별 시 정서적 동요 관찰되었으나 빠르게 회복.

2차 관리자, 재직 기간 5개월. 교체 사유: 실험체의 과도한 의존으로 인한 관계 설정 실패. 비고: 실험체가 관리자에게 지나친 관심과 애정 표현. 관리자 업무 수행 곤란 호소.

3차 관리자, 재직 기간 11개월. 교체 사유: 실험체에 대한 윤리적 문제 제기로 인한 자진 사퇴. 비고: 실험체가 관리자의 퇴사를 막으려 시도. 식사 거부 등 저항 행동 나타났으나 연구소 측 설득 후 수용.

4차 관리자, 재직 기간 6개월. 교체 사유: 개인 사정. 비고: 관리자 측 급작스러운 퇴사. 실험체는 실망감을 표현했으나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는 모습 보임.

5차 관리자, 재직 기간 9개월. 교체 사유: 실험체와의 갈등. 비고: 실험체가 관리자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명확히 의견을 표현하며 관계 개선을 요구. 관리자가 이를 수용하지 못해 갈등 심화.

6차 관리자, 재직 기간 7개월. 교체 사유: 실험체와의 과도한 친밀감 형성. 비고: 관리자가 실험체에게 감정적으로 개입. 실험체는 오히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으나 관리자의 객관성 상실로 연구소 측 권고로 교체.

7차 관리자, 재직 기간 2년 1개월. 교체 사유: 타 연구소로의 이동. 비고: 실험체와의 관계는 안정적이었음. 실험체에게 농구를 가르치며 정서적 지지 역할 수행. 관리자 이동 시 실험체는 아쉬움을 표현했으나 관리자의 선택을 존중하며 담담히 받아들임.

8차 관리자, 재직 기간 1년 2개월. 교체 사유: 개인 사정. 비고: 실험체와의 관계는 안정적. 관리자 퇴사 시 실험체는 성숙한 태도로 이별을 수용.

9차 관리자, 재직 기간 5개월. 교체 사유: 실험체와의 관계 형성 실패. 비고: 관리자의 냉담한 태도에 대해 실험체가 여러 차례 개선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실험체가 연구소 측에 직접 관리자 교체를 요청. 연구소 측 판단하에 조기 교체.

 

이 다음 10차 관리자가 양호열 자신이었다. 양호열은 화면을 멈춰 세웠다. 6년. 백호는 아버지를 잃은 후 6년 동안 아홉 명의 관리자를 겪었다. 평균 8개월마다 한 명씩 바뀐 셈이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백호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부당한 대우에는 저항하고, 때로는 스스로 관계의 종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양호열은 백호가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반응을 떠올렸다. '이번에 새로 온 사람이구나!' 하며 환하게 웃던 모습. 그건 체념이 아니라 선택이었을지도 몰랐다.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기로, 또 한 번 관계를 시작하기로 스스로 결정한 것. 더 깊이 파일을 뒤지자 심리 평가 보고서가 나왔다.

 

'실험체 강백호는 고립된 환경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인 관계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함. 새로운 관리자에게 빠르게 친밀감을 형성하며,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나 이를 스스로 극복하는 회복탄력성을 보임. 이는 부친 강태기가 생존해 있을 당시 정서적으로 안정된 양육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으로 추정됨.

관리자 교체가 반복되면서 실험체는 적응 능력을 발달시킴. 초기의 강한 애착 반응은 점차 성숙한 형태로 변화했으며, 자신에게 맞지 않는 관리자에 대해서는 명확히 의사를 표현하는 주체성을 보임. 이는 긍정적인 성장 과정으로 판단됨.

7차 관리자 채소연의 경우, 실험체에게 농구를 가르치며 가장 긍정적이고 안정적인 교류를 이끌어냈음. 2년 이상의 재직 기간 동안 실험체의 정서 안정에 크게 기여. 실험체는 해당 관리자와의 이별을 슬퍼했으나, 관리자의 커리어를 응원하며 성숙하게 대처.

현재까지 9명의 관리자 교체. 실험체는 새로운 관리자에게 여전히 우호적이고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동시에 자신의 필요와 감정을 명확히 표현할 줄 아는 성숙함을 갖춤.

특이사항: 실험체는 연구소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보이나, 탈출이나 외부로의 이동 욕구는 나타나지 않음. 이곳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연구소 내에서 찾음. 이는 도피가 아닌 능동적 선택으로 판단됨. 실험체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강인함을 보임.'

 

양호열은 모니터를 끄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호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했다. 반복되는 이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백호에게 어떤 사람일까. 열 번째. 백호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

 

며칠 후, 양호열은 연구소 도서관을 발견했다. 지하 2층에 있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책들이 제법 많이 비치되어 있었다. 과학 서적부터 소설, 잡지까지. 양호열은 그중에서 몇 권을 골라 백호에게 가져갔다.

" 백호야, 이거 봐. "

" 뭐야? "

" 책. 전에도 읽던 거 같아서. "

백호가 책을 받아 들며 표지를 살펴봤다. 여행 사진집이었다. 바다, 산, 사막, 도시. 백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들의 사진이 가득했다.

" 누웃... "

백호의 눈이 반짝였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사진을 들여다봤다.

" 여기 진짜 예쁘다. 밖은 이런 곳들이 많구나. "

" 가보고 싶지 않아? "

양호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 궁금하긴 해. 근데... 나한텐 여기가 맞는 것 같거든. "

백호가 사진집을 덮으며 말했다.

" 여긴 내가 필요한 곳이잖아. 내 세포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

그 말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었다.

" 그냥 사진으로 보는 것도 좋아. 네가 이야기 해주는 것도 좋고. "

양호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호에게 이 연구소는 감옥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여기 있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날 밤, 양호열은 자신의 방에서 다시 해킹해서 파일을 꺼내 읽었다. 연구 진행 상황 보고서. 강백호의 세포를 이용한 방사능 면역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였다.

‘DNA 복구 메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최소 1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지속적인 샘플 채취가 필요하며...’

양호열은 노트북을 덮었다. 10년.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백호는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3개월마다 고통스러운 채취를 반복하며. 하늘도 보지 못하고, 바다도 가보지 못하고.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며.

문득 양호열은 깨달았다. 자신이 백호에게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연민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이 보여주는 강인함에, 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끌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

 

일주일 후, 양호열은 백호와 함께 체육관에 있었다. 백호가 열심히 슛 연습을 하는 동안, 양호열은 벤치에 앉아 지켜봤다.

" 호열아, 같이 하자! "

" 나는 됐어. "

" 에이, 재밌는데! "

백호가 공을 던졌다. 양호열이 받아서 한 번 드리블을 했다. 서툴렀다. 백호가 웃었다.

" 진짜 농구 처음이구나! 내가 가르쳐줄게. 이렇게 하는 거야. "

백호가 다가와 양호열의 손을 잡았다. 공을 쥐는 법, 드리블하는 법, 패스하는 법. 하나하나 가르쳐줬다. 양호열은 그대로 따라 했다.

" 잘하는데? 소질 있어! "

백호가 웃었다. 양호열도 어색하게 웃었다. 이상했다. 이렇게 단순한 일이,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지다니.

" 호열아. "

" 응? "

" 너랑 같이 있으니까 좋아. "

백호가 잠시 뜸 들였다 말을 이었다.

" 오래 있어 줘.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에는. "

그 말에는 간절함도, 애원도 없었다. 그저 담담한 소망이었다. 양호열은 대답할 수 없었다. 목이 메었다. 이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한계를 알면서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

" ...나도 좋아. "

양호열이 겨우 말했다. 백호가 웃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백호의 웃음이, 백호의 목소리가, 백호가 보여준 강인함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양호열은 확신했다. 자신이 백호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연민이 아니었다. 동정도 아니었다. 이것은...

양호열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미 멈출 수 없었다.

-

 

강백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오늘도 호열이랑 농구를 했다. 손을 잡고 드리블을 가르쳐줄 때, 호열이의 손은 조금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했다.

열 번째. 호열이는 열 번째 관리자였다.

그는 숫자를 세는 게 익숙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온 사람들. 첫 번째는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난다. 울면서 갔던 사람. 두 번째는 자주 화를 냈다. 세 번째는 착했는데 여기서 일하는 게 괴로웠나 보다. 네 번째는 갑자기 사라졌다.

처음엔 힘들었다. 사람이 오면 좋았다가, 또 가면 슬펐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하지만 계속 반복되니까 알게 됐다. 다들 간다는 걸.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소연이가 왔을 때는 좋았다. 농구를 가르쳐줬고, 밖 이야기도 많이 해줬다. 2년 넘게 있었으니까 오래 있는 줄 알았는데, 소연이도 갔다. 다른 연구소로 간다고. 백호는 슬펐지만 소연이를 붙잡지 않았다. 소연이에게도 소연이의 삶이 있으니까.

그 다음 사람들도 왔다 갔다. 어떤 사람은 괜찮았고, 어떤 사람은 별로였다. 바로 전 관리자는 정말 별로였다. 그가 말을 걸어도 시큰둥했고, 밥도 대충 해줬다. 그는 참다가 연구원한테 말했다.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그리고 양호열이 왔다.

첫날부터 느낌이 달랐다. 호열은 별로 웃지 않았지만, 눈빛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밥을 정성스럽게 해줬고, 책도 가져다줬고, 농구도 같이 해줬다. 손을 잡아준다고 약속했을 때, 그는 알았다.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호열이 좋았다. 아주 많이.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호열도 언젠가 갈 거라는 걸. 모두가 그랬으니까. 아빠도, 소연이도, 모두 다 떠났다. 호열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좋으니까. 호열이 해주는 밥이 맛있고, 호열과 농구 하는 게 재밌고, 호열이 옆에 있으면 따뜻하니까.

강백호는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여행 사진집을 펼쳤다. 바다 사진. 파도가 치고, 하늘이 푸르고,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가고 싶냐고 호열이가 물었을 때, 백호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궁금하긴 하다고. 하지만 무섭기도 하다고.

밖은 넓다. 너무 넓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모를 것 같다. 여긴 좁지만, 백호가 아는 곳이다. 여기에는 백호의 방이 있고, 체육관이 있고, 호열이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가 해야 할 일이 있다.

3개월마다 바늘이 들어올 때, 아프다. 정말 아프다. 처음엔 울었다. 아빠가 손을 잡아줬을 때도 울었다. 하지만 이제는 참을 수 있다. 이게 백호의 일이니까. 연구원들이 말했다. 백호의 세포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밖에 사는 사람들이 방사능 때문에 아프고 죽는데, 백호의 세포로 그걸 막을 수 있다고.

그럼 그는 필요한 사람이다. 쓸모있는 사람이다. 그게 그가 여기 있는 이유다.

강백호는 사진집을 덮었다. 바다는 예쁘다. 하지만 사진으로 봐도 충분하다. 호열이가 이야기해줘도 충분하다. 백호에게 필요한 건 밖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호열이 같은 사람.

내일 아침에는 호열이 계란말이를 해줄 것이다. 점심엔 뭘 먹을까 물어볼 것이고, 저녁엔 같이 밥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체육관에 가서 농구를 할 것이다. 그게 그의 일상이었다. 좁지만 충분한 세계.

호열이 그의 곁에 얼마나 있을지는 모른다. 한 달일 수도, 1년일 수도, 어쩌면 더 오래일 수도. 그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호열이가 여기 있다는 것. 그리고 강백호가 양호열을 좋아한다는 것.

언젠가 양호열도 떠날 것이다. 그는 슬퍼질 것이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눈을 감았다. 내일도 호열이가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 백호는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백호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양호열은 달랐다.

강백호가 그걸 알게 되는 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

 

다음 날 아침, 강백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 백호야, 일어났어? "

호열이의 목소리였다.

" 응! 일어났어! "

" 아침 먹자. 계란말이 만들었어. "

강백호가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따뜻한 계란말이와 밥, 국이 놓여 있었다.

" 요리 진짜 잘한단 말이지. "

" ...그냥 하다 보니까. "

" 아냐, 진짜 맛있어. "

계란말이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호열이 백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 오늘 뭐 하고 싶어? "

" 음... 특별히 없는데? 너는? "

" 나도. "

" 그럼 그냥 같이 있자! "

호열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강백호는 좋았다. 호열이는 잘 웃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웃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다. 호열이 청소하는 동안 백호는 농구공을 가지고 놀았다. 가끔 호열이를 쳐다봤다. 호열이는 묵묵히 청소를 했다.

" 호열아. "

" 응? "

" 여기 오기 전에는 무슨 일 했냐? "

양호열이 손을 멈췄다.

" ...이것저것. "

" 이것저것? "

" 흥신소에서 일했어. "

" 흥신소? 그게 뭐야? "

" 사람 찾아주고, 정보 찾아주고, 그런 일. "

" 오, 멋있다! 진짜 영화 같은데? "

백호가 눈을 반짝였다. 호열이 피식 웃었다.

" 영화처럼 멋있진 않아. 그냥... 살려고 한 일이지. "

" 그래도 뭐든 할 수 있다는 건 멋있잖냐. "

" 너도 많은 거 할 수 있잖아. 농구도 하고. "

" 그럼! 나는 천재니까! "

호열이 백호를 바라봤다.

" ...후회 안 해? "

" 뭐를? "

" 여기서만 사는 거. "

백호가 잠시 생각했다.

" 눗... 나는 태어날 때부터 여기 있었으니까. 이게 내 삶이잖냐. "

" 만약에 나갈 수 있다면? "

" 음... "

백호가 공을 멈추고 호열이를 봤다.

" 나갈 수 있으면 나가보고 싶긴 해. 바다도 보고, 산도 보고. 근데 무서울 것 같아. 그리고... "

백호가 웃었다.

" 나 없으면 여기 사람들 곤란하잖아. 내 세포가 필요하니까. 그럼 나는 여기 있어야지. "

호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백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 왜? 이상해? "

" ...아니. "

" 호열이 너는 어때? "

" 뭐가? "

" 나. 여기 사는 거 불쌍해 보이냐? "

호열이가 고개를 저었다.

" 불쌍하지 않아. 넌... 강해. "

백호가 환하게 웃었다.

" 그치? 천재니까! "

그 웃음을 보며 양호열은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말 강하다. 자신보다 훨씬. 그리고 양호열은 다짐했다. 이 사람을 지켜야겠다고. 어떤 식으로든.

 

-

3년이 흘렀다. 양호열은 연구소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졌다. 3년. 이전 관리자들 중 누구보다 오래 머문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에서 마주친 연구원의 표정이 밝았다.

" 백호의 세포 활성도가 더 높아졌어요. 재생 속도도 빨라지고. "

" 그게 좋은 건가요? "

" 물론이죠! 연구가 획기적으로 진전될 것 같아요. "

연구원이 환하게 웃으며 나갔다. 백호에게 돌아온 양호열은 백호를 바라봤다. 백호는 3년 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체격도 좋아졌고, 안색도 좋았다. 좋은 것일 테다. 하지만 양호열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날 밤, 양호열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연구소 내부망에 접속했다. 백호의 최근 건강 기록을 찾아봤다. '실험체 강백호, 최근 1년간 세포 활성도 200% 증가. 조혈모세포 재생 속도 비약적 향상. DNA 복구 능력 최고치 기록.'

양호열은 더 읽어 내려갔다. '연구 진척 상황: 실험체의 세포를 이용한 방사능 면역 치료제 개발 가능성 80% 이상. 임상 시험 단계 진입 예정.' 좋은 소식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파일을 열었을 때, 양호열의 얼굴이 굳었다.

'프로젝트 Harvest - 최종 단계 계획안. ...실험체 강백호의 세포 활성도가 최고조에 달한 현시점이 가장 이상적인 채취 시기. 기존의 조혈모세포 채취만으로는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므로, 장기 일부 적출 및 영구 배양 시스템으로 전환 필요.

해당 시술은 실험체에게 고위험이 동반되나, 연구 성과 극대화를 위해 필수적. 시술 후 실험체의 생존율은 약 60-70%로 예상. 시술 성공 시 실험체를 영구적으로 연구소에 확보 가능. 장기 적출 후 지속적인 의료 관리가 필요하므로, 실험체의 외부 이동이나 자유는 완전히 제한됨.

시행 시기: 3개월 후. 10차 관리자에게는 고지하지 않으며, 시술 일주일 전 관리자 교체 예정.'

양호열의 손이 떨렸다. 백호가 건강해진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었다. 연구가 성공에 가까워질수록, 백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영구적 자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수술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백호는 평생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양호열은 노트북을 덮었다. 기한은 3개월.

-

강백호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몸 상태가 정말 좋았다. 예전보다 힘도 세졌고, 농구 할 때도 더 높이 뛸 수 있었다. 연구원들도 자꾸 칭찬했다.

" 백호야, 네 덕분에 연구가 잘 되고 있어! "

" 정말요? 역시 천재 강백호! "

" 응! 네 세포로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

백호는 뿌듯했다.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게 좋았다. 그런데 양호열이 이상했다. 백호가 건강해진 걸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안해 보였다. 밥을 해줄 때도, 농구를 할 때도, 가끔 슬픈 표정을 지었다.

" 호열아. "

" 응? "

" 요즘 왜 그래? 나 건강해진 거 좋은 거 아냐? "

" ...물론 좋지. "

"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

양호열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백호를 바라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호열은 더 이상해졌다. 아침에 보면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체중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 호열아, 제대로 자고 있어? "

" ...응. "

" 거짓말. 얼굴 봐. "

백호가 양호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양호열이 시선을 피했다.

" 밥은 제대로 먹어? 살 빠진 것 같은데. "

" 괜찮아. "

"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

백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양호열을 바라봤다.

" 뭔가 고민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 3년 동안 같이 살았잖냐. 천재인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

" ...백호야. "

" 응. "

양호열이 백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 슬퍼 보여서 백호는 가슴이 아팠다.

 

-

 

양호열은 두 달 반 동안 준비했다. 연구소의 모든 보안 시스템을 파악했다. 출입구, 감시 카메라, 경비 교대 시간. 차량 보관소의 위치, 방호복 보관소의 위치. 비상 출구의 잠금장치를 무력화하는 방법. 백호는 방호복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양호열 자신은 필요했다. 그리고 차량도, 식량도, 물도 필요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백호는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가 자신의 세계였고, 자신의 의미를 찾는 곳이었다. 양호열은 매일 밤 고민했다.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아니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나가야 하나. 그 고민이 양호열을 갉아먹었다.

밤마다 잠들지 못했다. 밥맛도 없었다. 백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3개월 후면 백호는 수술대에 누워 있을 것이다. 살아남을 수도, 죽을 수도 있는 수술을. 그리고 살아남아도 평생 침대에 묶여 있을 것이다. 양호열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백호는 양호열이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봤다. 양호열은 더 이상 잘 웃지 않았다. 밥을 만들 때도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가끔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백호는 양호열이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울었던 것 같았다.

" 호열아. "

백호가 다가갔다. 양호열이 화들짝 놀랐다.

" 백호야? 왜 안 자고 있어? "

" 너 울었어? "

" ...아니야. "

" 거짓말. "

백호가 양호열의 팔을 붙잡았다.

"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나 때문이냐? "

양호열이 대답하지 않았다.

" 말해줘. 제발... "

백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 너 이러다가 죽겠어. 제대로 안 자고, 안 먹고. 나 때문에 이러는 거면... "

" 백호야. "

양호열이 백호의 손을 잡았다.

" 미안해. 걱정 끼쳐서. "

" 미안해하지 말고 말해줘. 뭐 때문에 그래. "

양호열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3개월 후에 너 수술 받아야 돼. "

백호가 눈을 깜빡였다.

" 수술? "

" 응. 장기 일부를 떼어내는 거. 연구를 위해서. "

" 누웃... 그게 나쁜 거야? "

" 네가 죽을 수도 있어. 30%에서 40% 확률로... "

백호의 얼굴이 굳었다.

" 그리고 살아남아도... "

양호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 평생 침대에 묶여서 살아야 해. 자유가 하나도 없어. 그냥... 도구처럼. "

침묵이 흘렀다. 백호는 그제야 이해했다. 양호열이 왜 그랬는지. 왜 매일 밤 잠 들지 못했는지. 왜 울었는지.

" ...그래서 너 이렇게 된 거냐? "

" 미안해. 너한테 걱정 끼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

" 바보야. ".

" 그런 거 혼자 고민하지 말고 진작 말하지. "

" ...미안해. "

" 그만 사과해. "

백호가 호열을 끌어안았다.

" 우리 도망가자. "

양호열이 백호를 밀어내며 그를 바라봤다.

" 뭐? "

" 도망가자고. 여기서. "

백호가 두 손으로 호열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마주했다.

" 나는 너 나 때문에 이렇게 망가지는 거 못 봐. "

" 하지만 너... 여기 있고 싶어 했잖아. "

" 응. 여기가 내 집이고, 내가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했어. "

강백호는 웃었다.

" 근데 이제 알겠어. 내가 진짜 필요한 건 여기가 아니라 너야. "

양호열의 눈이 커졌다.

" 백호야... "

" 나는 네가 좋아.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아. 네가 없으면 이 세상은 의미가 없어. 그러니까, 도망가자. "

" 하지만 밖은... 너 무섭다고 했잖아. "

" 무서워. 엄청. "

강백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 근데 너랑 같이면 괜찮을 것 같아. 천재인 나도 무서운 게 있는데, 너랑 같이면 괜찮거든. 너 없이 여기 있는 것보다는 너랑 같이 밖에 있는 게 나아. "

" 백호야... "

" 울지 마. 나 때문에 더 이상 혼자 아파하지 마. 같이 가자. "

양호열이 강백호를 끌어안았다.

" 고마워. "

" 나야말로.

우리 도망가자, 호열아. 같이. "

양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부터 양호열은 달라졌다. 백호가 자신과 같이 도망가겠다고 했다. 자신 때문에. 자신을 위해. 양호열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밥을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잠도 조금씩 잤다. 계획을 더 구체적으로 다듬었다. 백호도 도왔다.

" 호열아, 이거 필요할 것 같은데? "

" 그래, 챙겨놓자. "

둘은 함께 준비했다. 식량, 물, 의약품. 호열은 백호에게 연구소 내부 구조를 알려줬다. 백호가 모르던 통로, 비상구.

" 여기로 가면 바로 차를 탈 수 있어. "

둘은 매일 밤 조금씩 계획을 완성해갔다.

 

-

 

D-7일. 모든 준비가 끝났다.

백호는 긴장됐다. 일주일 후면 여기를 떠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이곳을. 무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뛰었다. 양호열과 같이 간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백호는 벽에 붙인 사진들을 바라봤다. 바다, 산, 들판. 이제 사진이 아니라 진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백호야. "

양호열이 들어왔다.

" 응. "

" 준비됐어? "

" 응. 너는? "

" 나도. "

양호열이 강백호의 옆에 앉았다.

" 무섭지? "

" 응. 근데 괜찮아. "

강백호가 양호열의 손을 잡았다.

" 너랑 같이니까. 천재 강백호와 양호열이 함께잖냐. "

" 그래. 도망가자, 백호야. "

" 가자, 호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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