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이미지를 누르시면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소년 달 - 추신.jpg

손을 들어 인사해

소년:달 - 추신

양호열, 이십 구 세, 동네 화방에서 근면 성실 일하는 중.

오늘 칠 킬로짜리 사료 포대에 머리를 맞았습니다.

뻗었습니다.

-

눈을 뜨니 모르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게 뭐지’라는 합당한 의문을 먼저 떠올렸겠지만, 주변의 소란이 생각을 지연시켰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호열의 양옆에서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들이밀었다.

“호열아!”

“호열 군! 정신이 드니?”

이게… 대체…. 너무 가까운 얼굴에 손을 휘젓자 그들은 얼른 호열의 어깨를 잡고 등에 손을 넣어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웩, 시야가 빙글 돈다.

“내가 무거운 건 바닥에 두랬잖아!”

“아니, 자리가 없어서 잠깐만 올려둔다는 게….”

“올릴 거면 제대로 올리든가, 네가 창고에서 나오자마자 호열이가 쓰러졌는데 보나 마나 발판도 안 쓰고 대충 던졌겠지. 하여간 넌 예전부터 그랬어. 좋게 말하면 알아먹지 않고 꼭 사고가 터지거나 화를 내야 겨우 고쳤다고. 그나마 처자식 생기고 사람 꼴을 좀 갖추나 싶더니 결국 제 버릇 못 버렸네. 너는 양심이 있으면 접싯물에 코 박고-”

“자, 잠시만요.”

정신없는 와중에도 놓치기 어려운 살기다. 호열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급히 입을 열었다. 다음 말은 생각이 안 났다. 고장 난 균형감각에 팔을 앞으로 뻗자, 이번에는 손바닥에 복슬복슬한 감촉이 들어찼다. 곧이어 축축해졌다. 무슨 사람만 한 푸들이 호열의 손바닥을 연신 핥았다. 팔 아래 자신의 복장은 처음 보는 유니폼이다. 몸 오른편에는 큼직한 사료 포대가 덩그러니 놓였다.

여긴 꿈인가. 들이닥치는 정보와 당최 맥락을 모르겠는 상황에 머리의 울림이 가속되었다. 호열은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했다. 무거운 거… 바닥… 사료… 푸들… 북슬북슬 축축한…푸들… 사료가 있으면 먹여야지….

“우선 얘 밥부터 주죠.”

결국 호열은 못 버텼다. 앞으로 고꾸라진 상태로 또 기절했다.

-

병원에서 가벼운 뇌진탕과 일시적인 기억상실을 진단받았다. 점장 남매는 두 번째 진단명에 충격받았고 호열은 환자 정보에 충격받았다. 내가 스물아홉이라고? 호열은 침대 옆에서 석고대죄하는 남자에게 질문했다.

“제가 그 가게에 칠 년째 일하고 있다고요?”

“육 년 됐고 이제 칠 년 채워가. 아주 든든한 직원이지.”

“멋지네요.”

호열은 제 미래에 큰 기대가 없는 편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객사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내심 여겼다. 그러니 이렇게 적당히 직업을 잡고 뿌리내렸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호열의 밝은 얼굴을 어벙하게 쳐다보는 남자 옆에서, 이번에는 여자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방학식 끝나고 친구들이랑 노래방 간 거요.”

방학식. 여자가 이마를 짚었다. 남자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호열 군 대학 안 나왔지…. 못해도 십 년 치 기억이… 아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머리를 쥐어뜯는 남자를 무시하며 여자는 호열의 나이를 자세히 알아내려 애썼다.

“년도는? 몇 학년인지 대답할 수 있어? 그해 특별한 뉴스라든가.”

“년도라….”

호열은 눈을 감았다. 갑자기 물어보니 올해가 몇 년도인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충격의 여파일까. 방학식도 그 순간만 기억나지, 정확히 몇 학년의 방학식인지 모르겠다. 떠오르는 얼굴이 다 그놈이 그놈이라. 그럼 특별한 일을 떠올려 보자. 음. 뉴스 같은 걸 챙겨볼 만큼 세상에 관심 없는데….

아.

호열은 붕 뜬 발을 지켜본다. 가지런히 정렬된 길쭉한 종아리, 머리 위 두 손은 공을 떠나보낸 뒤에도 그대로 굳어있다. 주황색 윤곽의 농구공이 거미줄 같은 그물을 통과한다. 귀에 감기는 마찰, 뒤따라오는 진동, 공이 코트 끄트머리로 굴러가는데도 림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인영. 그가 손을 내려 허리를 짚는다. 등 언저리를 조심스레 문지른다. 이어 몸을 돌려 호열을 정확히 쳐다본다. 커다랗게 발을 구르며 코앞까지 다가온다. 그가 몇번이고 폴짝이며 크게 외친다. 완전 멀쩡해!

천재 강백호의 부활이다!

“친구가 재활에 성공했어요.”

호열이 속삭였다. 제가 입은 환자복을 가만히 쓸었다.

“농구 하는 애인데, 저번 시합 때 등을 다쳤거든요. 다행히 가을쯤에 다시 뛰어도 된다는 소견을 받았어요. 엄청 노력했죠.”

“그럼 지금 너는 고등학생 일 학년이구나.”

과연 칠 년 가까이 보아온 사이라 호열의 과거를 얼추 아는 듯했다. 여자가 꼿꼿하던 등에 힘을 풀었다. 한숨 쉬고는 씁쓸히 미소 지었다.

“안녕, 십 대의 호열 군. 미래에 온 걸 환영해.”

-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어른이란다. 고교 시절의 추억과 사회초년생의 고군분투를 모두 넘기고 아저씨가 되었다니. 열여섯 끝자락에서 기억이 멈춘 호열에게는 너무 큰 이변이다. 지금 호열의 입장으로는 자신은 기억을 잃은 스물아홉이 아니라 갑자기 미래로 떨어진 열여섯이다. 화내야 할지 신기해 해야 할지. 사실 머리만 좀 아픈 거 빼면 호기심이 더 크다만.

퇴원해도 된다는 소리에 그들은 순식간에 호열의 진료비를 수납하고 차를 끌고 와 호열을 태웠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이사 안 갔지?”

여자가 생각 없이 질문했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응, 그대로일 거야. 얼마 전에도 태워줬으니까.”

조수석에서 남자가 웅얼거렸다. 승합차가 천천히 도로 위에 올랐다.

“머리가 다친 것도 문제지만, 기억을 잃은 것도 큰일이네. 아무리 일시적이라고 해도 말이야.”

“기억 못 돌아와도 저 계속 써주실 거죠?”

생계 걱정에 물은 질문에 점장 남매 둘 다 침묵했다. 이어 그들은 힘차게 ‘당연하지!’를 외쳤지만 이윽고 ‘이게 십 대의 혈기인가’ ‘호열 군은 원래 저랬어’ 따위의 대화를 나지막이 나눴다.

“직장 걱정은 안 해도 돼. 그것보다는 회복에 집중해. 이렇게 됐으니 오늘은 당연히 쉬고, 내일도 쉬어. 월요일부터 가게 전체 휴가긴 한데… 휴가 때 뭐 할지도 다 잊었겠구나.”

“집에 가면 적어둔 게 있을 거예요.”

호열은 여상히 대답했다. 현실 감각을 창고 바닥에 두고 왔는지 아직도 꿈속인 기분이다. ‘호열 군은 원래 저랬어’ 그래, 이십 대의 자신도 십 대의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가 보지. 위기감을 죄 짊어진 남매가 조금 안쓰러워서, 호열은 되려 그들을 위로했다.

“금세 기억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 일시적이랬잖아요. 그보다는 지금 포포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돌아, 어라.”

포포? 호열이 제 입을 짚었다. 남자가 뒷좌석의 호열을 번개같이 돌아봤다. 포포를 기억해? 호열은 병원 때처럼 허공을 응시했다. 진갈색의 스탠더드 푸들, 호열이 취업한 지 삼 년 차에 여자 점장이 입양한 강아지. 포포는 매일같이 여자와 출근하며 화방 마스코트로 자리 잡았다. 두 발 걷기로 손님을 까무러치게 하는 취미를 가진 포포….

“방금 떠올랐어요.”

“다행이다. 의외로 쉽게 돌아올지도 몰라.”

백 마디 위로보다 한 번의 호전이 더 효과적이었다. 남매는 오늘 하루 중 가장 밝은 얼굴로 호열과 인사한 후 떠났다. 호열은 내린 장소를 확인했다. 예전 집 그대로다. 이사 갈 만큼의 돈은 없었나. 열쇠를 꺼내 문고리를 돌렸다.

집은 적당히 바뀌고 적당히 그대로였다. 호열은 사라진 전등과 새로운 수납장을 확인했다. 기분 전환 삼아 바꿨을 가구 위치를 살피며 거울 앞에 섰다. 흠, 조금 탔나? 얼굴 가죽이 얇아진 것 같기도 하다. 원래는 없던 주름이 입가에 생길락 말락 했다. 늙었네, 나. 아무리 본인이라 해도 냉혹한 평가에 스스럼없었다. 계속 관찰하려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어 처음 보는 유리병에 담긴 보리차를 늘 쓰던 찻잔에 따라 마셨다. 물맛이 변하진 않았다. 속에 들어오는 냉기에 몸이 오소소 떨렸다. 남의 집인 듯 아닌 듯, 어쩐지 불편하다.

맞은편에 걸린 달력에 눈길을 줬다. 어떤 월요일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화방 휴가가 월요일부터랬으니까… 오늘은 토요일이고. 와, 오늘이 며칠인지도 몰랐네.

개수대에 기대 차를 홀짝이고 있으려니 기억이 뜨문뜨문 돌아오긴 했다. 전등은 술 취한 날 넘어뜨려서 망가졌다. 수납장은 집 앞에 버려진 걸 주워 왔고. 가구 위치는 새해맞이 대청소하면서 겸사겸사 바꿨던 거 같다. 원래 쓰던 물병은 뚜껑이 깨져서 다 마신 주스 병에게 자리를 내줬지. 그 외에도 이것저것. 되살아나는 기억이 자잘해서 그런가, 그걸 다 소화해도 제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혹은 어른이란 게 별거 없거나.

벌써 저녁이다. 병원에서 시간을 오래 잡아먹었다. 호열은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내일부터 기억 탐색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지나온 길이나 주변인의 현재가 궁금하긴 했지만, 아무렴 머리 맞고 기절한 마당에 일단은 쉬고 싶었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다 해결됐으면 좋겠다. 은은한 두통을 품으며, 호열은 방의 불을 껐다.

-

미국에 갈 거야.

부상을 입은 후로 그것은 백호의 입버릇이 됐다. 언젠가의 병문안에서 마주한 선언. 우리나라에서 NBA에 진출한 사람이 나왔대. 미국 리그 말이야. 그다음에 가는 건 나야. 나는 미국에 갈 거야. 그 양반만큼 유명해지겠어.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소금기 묻은 바람. 가볍고 나풀거리는 것들을 흔들다 잦아들던. 거기에 호열의 마음도 포함되었던가. 말은 바로 해야지, 백호야. 넌 그것보다 더 유명해질 거야.

그래서 백호는 미국에 갔었나?

아, 물론. 그는 떠났다. 오랜 기다림과 준비 끝에 기어이 떠났다. 그의 곁에서 호열은 지켜봤다. 공부라면 거리낌 없이 편법을 쓰던 백호가 서점에서 슬그머니 영단어 책을 사 온 날을. 거기에 알파벳 발음 먼저 배워야 하지 않겠냐 하니 달아오르던 뺨을. 그렇게 발그레진 얼굴로 다시 서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서투른 필기체, 까매진 손날, 구겨진 미간, 회화를 담은 카세트테이프.

수납장에서 캠코더 테이프를 발견했다.

호열은 캠코더 속 그들을 봤다. 당연하게도 영상의 주인공은 강백호다. 분명 일 학년 합숙 훈련 때 녹화한 테이프를 제가 맡아두긴 했다. 그런데 양이 불었다. 호열은 라벨지에 적어둔 제목으로 그것이 합숙 훈련의 후속작임을 인지했다. 하긴 복귀하려면 기초를 또 쌓아야 한댔으니까. 백호군단은 사후 관리도 성실히 해줬을 거다. 같이 들어있던 캠코더에(그때 사용한 캠코더는 아니다) 넣어 재생해보니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늘어난 조력자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기존 인원에서 한나 선배만 합류한 구성이었는데 영상이 흐를수록 잠시 들렀다며, 감시하러 왔다며 아는 면면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결국 나온 인물을 전부 헤아리면 정규 농구부 활동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취재하러 온 능남고의 박경태까지 있으니 평소보다 더 북적이는 편인가.

쉬는 시간, 캠코더를 든 용팔이 체육관 출입구로 다가간다. 지켜보던 채소연의 친구들에게 장난스레 묻는다. 어떠신가요, 백호의 훈련을 지켜본 소감은? 희정이 답한다. 일 학기 때보다 더 진지해졌네요. 송희가 덧붙인다. 복귀를 축하합니다, 강백호 선수. 계속 응원할게요!

많은 사람이 백호를 응원했다. 그를 아꼈다. 호열의 마음이 기분 좋게 무거워졌다. 이제 어딜 가서도 널 찾는 사람이 많구나. 미국으로 가기 전에도 이랬으니, 그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겠지.

백호가 미국으로 떠난 시점이 슬슬 기억나는 것도 같다. 대학을 그쪽으로 간다고 꽤 진땀 뺐지. 영감님 턱살을 두드리며 ‘입학장 나와라 뚝딱’ 같은 이상한 주문을 외기도 했고. 결국 무슨 장학 재단에 선정돼서 미국행이 확정되었나. 농구부가 한 번, 백호군단이 한 번, 총 두 번의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때마다 백호 녀석, 빨간 눈가를 애써 숨겼지.

자주 연락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긴 어려웠다.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백호군단도 먹고 살 궁리하느라 바빴고, 백호도 학교 생활하느라 정신없었으니까.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호열은 영상을 멈추고 캠코더를 편지 더미 위에 올렸다. 부상 탓인지 휴일을 고려해도 평소보다 늦게 눈이 떠졌다. 아침 겸 점심을 먼저 해결한 뒤 기억 탐색에 돌입했더니 이게 웬걸, 의외로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들었다. 물건 하나를 보면 추억이 떠오르고, 거기에 맞춰 나머지 기억이 고구마 줄기처럼 우르르 딸려올 줄 알았건만. 시원찮게 회상이 중간에 뚝 끊기기를 반복했다. 결국 집 안을 한바탕 뒤집어 추억의 무언가를 계속 찾아내야만 했다. 귀찮은데 그냥 이대로 살까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래도 돌아오는 기억 대부분이 좋은 내용이라 기뻤다. ‘잘 살아왔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십여 년이다. 그중 가장 좋은 건, 친구들의 삶도 무탈히 풀렸다는 것, 특히 백호가 언젠가 바랐던 것처럼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단 것.

너무 백호 근황만 궁금해하나, 나. 호열은 백호의 기사를 스크랩한 공책에 손을 올렸다. 자기 자신보다 궁금한 사람이다. 그다지 건강한 행동이 아니란 걸 알지만 오랜 습관이 되어버린 걸 어쩌나.

“오랜 습관.”

단어를 입 밖으로 내었다.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열여섯의 마음으로 돌아가서일까, 아니면 그를 향한 마음이 여전해서일까? 이미 읽어본 스크랩북을 치워두고, 바닥에 나뒹구는 편지를 하나 집었다. 백호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주고받기 시작한 편지.

“고백은 안 했겠지.”

우편 소인이 찍힌 대로 과거부터 미래까지 전부 톺아봤다.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담백했다. 딱 친구로서, 형제로서 나눌 만한 대화다. 그들의 우정 전선을 해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좋아하다 보면 언젠간 확 돌아버려서 냅다 고백해버리지 않을까 했는데. 자신은 생각보다 더 뚝심 있는 남자였나 보다. 하여간. 이 모습 또한 호열이 바라온 대로다.

조금 의외라면 이 교류가 일찍 끝났다는 것.

소인을 다시 살폈다. 스무살부터 시작한 편지. 호열의 과거와 미래. 미래와 미래. 과거와 과거. 현재는 없다.

가장 최근 날짜가 이 년 전이다. 그전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다. 한두 달 간격으로 보낸 편지가 분기로, 반년으로 늘어나더니 연말 잘 보내라는 인사말을 끝으로 이 년이 흘렀다. 강백호는 양호열에게 편지 보내길 멈췄다. 호열 또한 멈춘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끝났다. 흐지부지 자연스레.

서른이 되기도 전에 끝나다니. 놓아버린 편지가 맥없이 떨어졌다. 이런 결말을 생각 안 해본 건 아니다. 아무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일인데 그들이라고 다르겠나. 특별히 떠오르는 사건이 없으니 다툰 것도 아닐 테다. 내심 반론할 만한 증거, 그러니까 그들이 여전히 교류한다는 흔적을 찾아봤지만 연락처를 모아둔 수첩에서도 백호의 번호가 없어 오히려 확인 사살을 받았다.

쌀쌀맞은 현실에 호열이 스르르 바닥에 드러누웠다.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피해 옆으로 웅크렸다. 마음속으로 나름의 정리를 하려 애썼다.

정확히 짚자면 내 인생에서 넌 여전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어. 이 집에는 너와의 추억이 가득하고 나는 너의 소식을 계속 찾으니까. 하지만 그건 일방적으로 훔쳐보는 거야. 다가가고 싶으면 새로 편지를 쓰거나 너와 연락할 수단을 찾으려 동분서주했겠지. 이 거리를 방치하지 않고. 나는 더 이상 너를 내 삶에, 나를 네 삶에 끼워 넣고 싶지 않은 거야. 이걸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그렇지만 내가 정말 그걸로 만족할 줄은.

“이건 또 누구의 마음이려나.”

기억과 감정으로 들어찼던 가슴이 한순간에 텅 비어버렸다. 적어도 그런 감각을 느꼈다. 호열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참을 그 자리에 움직이질 않았다.

그늘진 방에서 캠코더가 희붐하게 빛났다.

-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가라앉은 의식이 얕게 떠올랐다. 눈을 뜨고 현관을 바라봤다. 바깥의 사람은 몇 번 더 문을 두드리더니 이어 열쇠를 사용해 실내로 들어온다. 낯익은 맨발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천장에서 계시가 내려온다.

“아직도 자?”

호열과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백호가 투덜거렸다. 방학이라도 규칙적으로 생활해야죠, 호열 군. 나랑 아침 운동 가기로 했잖아. 첫날도 예외 없으니 빨랑 일어나셔. 호열이 몸을 일으키는 동안 백호는 냉장고로 가 보리차를 꺼냈다. 컵 없이 입에 곧장 들이붓는 뒷모습을 호열이 지켜봤다.

“내가 열쇠를 우편함에 넣었던가?”

그러자 백호가 뒤돌았다.

“뭔 소리야. 여분 열쇠 나한테 줬으면서. 잠 덜 깼냐?”

꿈. 느린 자각이 찾아왔다. 호열이 알아차렸다. 지금이 꿈이구나. 기억을 잃은 첫날, 그가 본래의 시간대라 여겼던 나날. 지금은 과거임을 아는 순간. 호열의 열여섯 자아가 점차 희미해진다. 어린 백호가 기다리고 있어서, 호열은 운동화를 신었다.

해가 긴 계절인지 바깥은 벌써 밝았다. 아무리 달려도 호흡이 여유로웠다. 꿈속이라면 백호를 추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이 기찻길에 다다라 잠시 멈춰 섰다. 기차가 지나길 기다리면서 백호는 이마를 훔쳤고 호열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구경했다. 눈이 마주치자 백호가 입술을 비죽였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꿈자리가 사나웠어.”

“무슨 꿈 꿨길래 그러냐. 이야기나 들어보자.”

음. 시선을 정면으로 바꿨다. 기차는 이미 떠났다. 차단기가 느리게 올라가 길을 터줬다. 호열이 발을 떼는 동시에 말했다.

“하늘에서 개 사료가 떨어졌어.”

“엥?”

달리는 내내 호열은 백호에게 자신이 보고 온 미래를 들려줬다. 그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주변 사람의 근황, 백호가 거친 고난과 영광 따위를. 백호는 그것에 놀라기도, 당연한 듯 반응하기도 하다가 그들의 인연이 결말에 도달한 것 같다는 대목에 이르자 말도 안 된다는 듯 혀를 크게 찼다.

“그럴 리가 있겠냐! 오해가 있겠지.”

“그런 걸까.”

“너 아까부터 엄청 칙칙하게 군다. 아니면 뭐야. 호열이 넌 그러고 싶단 거야?”

나란히 뛰던 백호가 돌연 속도를 내더니 호열 앞에 멈춰 섰다. 정면에서 노려보는 백호의 눈이 햇살과 부딪혀 빛났다.

“나랑 평생 안 보고 싶어?”

“평생 보고 싶어.”

호열이 즉각 대답했다. 그 속도가 만족스러운지 백호가 인상을 누그러뜨렸다.

“그럼 됐네. 너 나랑 평생 보고 싶고, 나도 너랑 평생 보고 싶으니까 우린 계속 그럴 거야.”

백호가 호열의 어깨를 콱 쥐었다. 그러면서 호열의 동의를 기다리는 눈치라, 호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기억과 똑같다. 스크랩북, 편지, 미래 속 강백호와 다르다.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강백호다. 그런데 왜일까, 백호를 앞에 두면서도 어쩐지 호열은….

“그럼 나는 왜 너에게 연락하지 않았지?”

어깨에 얹힌 손을 떼어냈다. 백호를 피해 옆으로 돌았다. 호열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게 이 대목이다. 그렇게나 돈독하면서. 이렇게나 보고 싶으면서. 과거의 백호를 앞에 두면서도 그리워지는데. 영어가 입에 붙은, 시선이 조금 더 올라간, 삶의 흔적이 더 깊게 묻어난, 변함없는 빨간 머리의 백호가.

그 마음을 참아냈다고?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이 멀어진 계기에 호열 탓이 정말 없을까?

“네가 알아차린 거라면 어쩌지.”

“뭘 말이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기어이 말했다. 호열은 반대편으로 돌 걸 후회했다. 이 방향으로는 태양을 마주해 제 얼굴이 고스란히 내비친다. 마냥 무던한 표정은 아닐 거다. 아무리 꿈이라도 모든 걸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별로 친구다운 감정은 아니니까. 꺼림칙한 쪽이지. 그래서 네가 날 피하게 됐나 봐.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야.”

후. 호열이 한숨 쉬었다. 최대한 가벼워 보이려 애썼지만 고개는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견디기 어려운 건 작열하는 태양일까, 그의 시선일까. 뭐든 됐으니 이쯤에서 깨어나면 좋겠다. 이러면 악몽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 호열아.”

백호가 머리를 벅벅 긁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말 못 해. 네가 방금 한 말에 내가 어떤 기분인지. 그렇지만 있잖냐. 너랑 내 마음이 만약 다르더라도, 난 그래도 널 계속 만나고 싶을 거야. 피할 생각은 전혀 없을걸. …오히려 네가 날 피하고 싶어져도.”

어느샌가 감았던 눈을 뜨고 백호를 보자, 상기된 얼굴의 그가 있었다. 백호는 머뭇거리며 다시 호열을 잡았다.

“나는 꼭 그럴 테니까 너도 그래 주면 안 되냐. 너랑 내가 의견이 좀 안 맞는다든가, 실망한다든가, 내가 둔치같이 굴어서 갑갑해도 계속 옆에 있어 주라. 나 진짜로 너랑 멀어지기 싫어.”

마지막 말은 어린아이의 투정만큼 작고 웅얼거리는 어투였다. 허. 호열은 슬픔이 조금 가신 채 백호를 응시했다. 꿈이라고 서비스가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자 되려 차분해졌다. 이걸 말하면 박치기 확정이겠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호열의 욕심이 만든 백호일까.

현실의 백호도 이렇게 나와줄까?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래.”

호열이 말했다.

“그럴게. 당장 깨면 너부터 찾을게. 그러고는 옆에 눌러앉을 거야. 네가 아주 질릴 만큼.”

충동적으로 결심했다. 과거를 반추하며 만족하는 건 역시 그의 성미에 안 맞다. 호열은 지금의 백호를 만나고 말 테다. 연락할 방법은 찾으면 되고, 여건이 된다면 당장이라도 만나자. 약간의 다툼이 그들에게 있었다면 당장 사과하고. 혹 호열이 예상한 문제로 멀어진 거라면…

뭐 어쩌라고.

그래도 네가 날 정말로 내치진 못하겠지.

우물쭈물할 백호의 얼굴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다. 풀어진 공기에 백호도 덩달아 웃었다. 백호는 좋은 자세라며 호열의 등을 팡팡 치고, 머리까지 마구 헝클었다. 막으려 해봤자 소용없는 걸 알기에 호열은 얌전히 기다렸다. 잠시 뒤 백호가 만족한 듯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툭툭 건드리는 손길이지만 백호 나름의 조심스러움 또한 느껴졌다. 호열은 느긋한 마음으로 그것을 즐겼다. 손이 슥 물러나는 듯하더니…

“너 근데 좀 전에 한 말 있잖아.”

가까워진 목소리에 호열이 고개를 들자, 어쩐지 어리지만은 않은 백호가 있었다. 유독 크게 느껴지는 손이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햇살이 점차 강해졌다.

“그거 깨어나면 꼭 들려주기다.”

어깨가 떠밀렸다. 호열은 그대로 빛에 빠졌다.

-

우편함은 비어 있었다. 내부를 뒤지던 손을 끄집어내 손바닥을 확인했다. 오래 묵은 먼지가 손끝에 덧발라졌다. 그것을 입김으로 후 불어내며 생각했다. ‘이상한걸.’

호열이가 열쇠 넣는 걸 잊다니.

비행기가 연착하긴 했다만 어차피 한밤중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호열이 자는 동안 조용히 들어가겠노라 말해뒀는데, 열쇠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참 별일이다. 백호는 어깨를 추스르며 가방을 고쳐 멨다. 그가 경험하기로 호열은 자신과 관련된 일은 웬만큼 잊지 않았다. 오래전 정리한 자신의 집 주소라든가 경기 일정, 여러 번 바뀐 전화번호, 재미없는 알파벳의 나열인 이메일 주소 같은 것 말이다.

주 연락을 편지에서 이메일로 바꾸기로 합의한 후, 미국 집 주소는 자연히 잊었을 거라 여겼다가 전혀 그렇지 않음을 확인했을 때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기도 했다. 그만큼 기억력 좋은 호열이 이런 중요한 일을 잊다니. 그래도 백호의 귀국까지 잊은 건 아닐 테다. 일부러 호열의 휴가에 맞춰 온 거니까. 달력에 제대로 표시했다는 말도 들었으니까. 화방 컴퓨터로 보낸 답장을 확인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했는데.

문제라도 생겼나. 자연히 호열의 신변이 걱정됐다. 백호의 머릿속에서 호열은 이미 최소 몸살에 최대 응급실행이다. 곁가지로 외계인에 납치된 호열, 직장이 폭발한 호열까지 있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작으므로 제쳐 뒀다.

웃. 순식간에 서늘해진 뒷골에 백호는 빠르게 상념을 떨쳐냈다. 생각은 일시 정지. 적당히 친한 사람이면 이런 망상은 하지도 않는데. 새삼 호열이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임을 체감했다. 가장 친한 친구이며 가족이나 다름없다. 백호에게 호열은 돌아갈 집이고 가끔은….

흡.

다시 한번 상기하자면, 일단 생각은 멈춰두자.

“하여간 걱정 끼치고 말이야. 이번에 온 김에 휴대 전화나 사줘야지.”

당장 집 앞이니 일단 문을 두드려 보기로 했다. 집에 있는 것만 확인해도 상상의 반은 줄어들 거다. 마음을 다잡은 백호가 남은 먼지까지 털어내려 손뼉을 부딪쳤다. 문 앞에 서서 팔을 들었다. 아침 햇살이 드리워진 문이 희게 빛났다.

호열을 만나기 위해, 백호는 문을 두드렸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