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이미지를 누르시면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Never let you go - 살길(萨吉).jpg

지나간 끝에서

Tát Cát (萨吉) - Never let you go

얕은 잠에서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 보였다. 몸을 옆으로 돌리자 비어있는 베개가 손에 닿았다. 한 번 쓸어내리니 보드라운 감촉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자 서울의 날씨와 캘리포니아의 날씨가 함께 떠 있는 위젯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화창하기 그지없는 캘리포니아의 날씨. 그리고 서울의 날씨를 눈에 담기도 전 창을 두드리는 빗줄기 소리가 먼저 호열을 불렀다.

백호가 미국에 간 이후로 호열의 핸드폰에는 언제나 서울과 미국의 날씨가 화면을 차지했다. 그건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호열은 뻐근한 몸을 일으켜 천천히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열자 빗방울이 샷시에 들이쳤다.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베란다 바닥에 놓인 재떨이를 들어 물을 조금 부은 뒤 창틀에 올렸다. 통돌이 세탁기 위에 올려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지포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자 평소보다 더 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비가 오는 날엔 늘 그랬다.

평소 담배를 피우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는다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저 시선을 흩트리고 필터를 빨았다가 뱉는 행위의 연속. 무슨 생각을 하려고 했다가도 숨을 뱉는 순간 연기와 함께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백호가 오는 날이었다.

3년이란 시간은 짧지 않았다. 백호와 연인으로 지낸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넘치게 사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백호에게 고백을 받고 어찌나 행복했는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연애하는 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헤어지는 것이 정말 백호를 위한 일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10년은 정말 긴 시간이었다.

손가락을 데울 정도로 짧아진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거실로 돌아온 호열이 거실장 가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10년간 백호가 보내온 편지가 가득했다. 헤어진 사이에 이걸 보관해서 뭘 할 것이냐 하겠지만 호열로서는 그 편지를 버릴 수가 없었다. 비록 답 한 번 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마음을 쓰레기봉투에 담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다른 서랍을 열어 진통제를 하나 챙겨 입에 넣었다. 물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메마른 목구멍에 알약을 쑤셔 넣고 두어 번 침을 삼켰다.

 

❱구식

정말 안 올거냐?

 

핸드폰의 진동이 짧게 울렸다. 10년 만에 귀국하는 친구를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참이었다. 당연하게도 호열은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아직 백호에게 친구 사이라는 것을 확답받지 못한 상태였다. 호열이 백호에게 헤어지자 말한 그 날 이후로 두 사람의 사이를 마땅히 정의하지 못했다. 연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친구로서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 호열은 그 환영회에 초대받기를 거절할 뿐이었다.

비싼 국제 전화를 붙들고 백호가 울던 날이 아직 생생했다. 네가 없으면 어떻게 사냐며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가겠다던 목소리가 그렇게 처절할 수가 없었다. 그런 백호에게 호열은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였을 때가 더 좋았다고 그동안 잠시 착각했던 것 같다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 사람만이 쌓아 올린 추억을 모두 어그러뜨렸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해.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NBA에 진출해 탄탄대로를 걸어야 하는 백호에게 동성 애인이 있다는 사실은 그의 앞길을 막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손을 뻗어 협탁 위 액자를 집어 들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함께 떠났던 동해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백호의 품에 안겨 활짝 웃고 있는 자신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헤어진 마당에 아직까지 사진을 갖고 있는 것도 웃기지만, 그게 아니면 그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양호열, 안에 있지?”

 

도어록의 전자음이 끝나자 곧이어 대남의 목소리가 들렸다. 빗물이 묻은 노란 머리카락을 털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는 호열의 손에 들린 액자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그렇게 청승 떨고 있을 거면,”

“그만해.”

“왜 바보같이 그러고 있는 거야?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하든가.”

“솔직하게 말하면 뭐가 달라지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호 그 녀석은 받아줄 거다.”

“10년이야. 우리가 헤어진 게.”

“10년 동안 너도 이 지랄 떨고 있는데 걔라고 뭐 다르겠냐?”

“걔는… 달라야지.”

“웃기고 있네. 옷이나 입어라.”

“왜?”

“애들이 너 무조건 데려오란다.”

 

대남의 말에 호열이 고개를 저었다. 대남의 얼굴에도 약간의 짜증이 비쳤다. 친구들에게도 미안하긴 했다. 그렇게 붙어 다녔던 다섯 사람인데 본인 때문에 불편해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호열은 부엌으로 가 커피포트에 끓인 물을 컵에 따랐다. 커피 믹스를 뜯어 넣고 수저로 저으니 동그랗게 회오리쳤다. 몽글몽글 뭉쳐진 가루를 티스푼으로 흩뜨렸다. 뒤에서 대남의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그가 줄 수 있는 건 고작 커피 한 잔뿐이었다.

 

“…백호가 보고 싶다고 하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다는 걸 너도 알잖냐.”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여린 살을 욱여넣고 잘근잘근 씹어대니 테이블에 잔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서랍을 열고 종이 더미를 뒤적거리는 소리도 이어졌다. 대남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채우는 편지 봉투를 바라보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편지를 이렇게나 보내는데 아닐 수가 없잖아.”

“…무슨 내용인지 모르잖아. 날 원망하는 걸지도 몰라.”

“천하의 양호열이가 이렇게 겁쟁인지 몰랐네.”

 

겁이 많을 수밖에. 백호와 관련된 일에는 자꾸만 겁부터 집어먹는 본인이 우스웠다. 그래도 자신이 조심한 덕에 백호가 안전하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야, 진짜 안 갈 거야?”

“안 간다니까.”

“어휴, 속 터져.”

“그러니까 헛수고 그만하고 가서 환영회나 잘 준비해.”

 

대남을 보낸 뒤에도 호열을 찾는 연락이 이어졌다. 백호 군단뿐 아니라 북산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두 온다며 네가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용팔의 전화를 시작으로 구식마저 집 앞에 찾아와 호열을 설득하려 했다. 호열은 핸드폰 전원을 끈 채 다시 침실에 본인을 가두기로 결정했다.

다시 잠에 들었다. 꿈에는 항상 백호가 함께였다. 헤어지기 직전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미국에 간 뒤에 머리를 아주 길게 기른 적도 있고 수염을 기른 적도 있었지만, 호열의 꿈에서는 언제나 익숙한 그 모습이었다. 꿈속의 백호와는 그저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오늘은 뭘 했냐고 물으면 백호는 전날 기사에서 본 스코어를 읊으며 오늘은 이만큼 득점했다고 대답해주곤 했다. 전부 다 아는 이야기였음에도 백호의 목소리로 듣는 것이 너무 좋아 꿈에서 깨지 않길 빌었다. 감히 그의 손을 잡거나 품에 안길 수도 없었다. 그의 손을 응시하려고 하면 자꾸만 현실의 천장이 눈에 보이는 탓이었다. 호열은 그저 자신의 앞에 있는 백호의 모습에 만족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목소리가 흐릿해지는 게 슬플 뿐이었다.

눈을 떴을 땐 온통 회색이었던 창밖이 완전히 검어진 상태였다. 몇 시나 됐을까. 백호는 잘 도착했을까. 호열은 침실 밖으로 나와 거실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불은 켜지 못했다.

“비밀번호는 왜 안 바꿨냐.”

창밖으로 들이치는 가로등 불빛에 붉은 머리가 반짝였다. 커다란 손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들려있었다. 테이블 위에 엉망으로 놓여 있던 편지들도 그대로였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니가 안 왔잖냐.”

“…내가 거길 어떻게 가.”

“양호열.”

 

이를 꽉 깨문 채 말하는 백호의 목소리가 뭉개졌다. 두 사람의 거리는 고작 세 발자국 정도였지만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백호는 자신의 티셔츠를 잠옷으로 입고 있는 호열의 모습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호열의 앞으로 향했다. 호열은 헤어지기 전보다 훨씬 커진 듯한 백호의 모습을 보며 살짝 몸을 움츠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온몸을 삼킬 것만 같았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편지에는 왜 답장도 안 했어?”

“….”

“친구로 지내자며, 어떤 친구가 전화도 안 하고 편지도 안 하냐?”

“…그건 미안하다.”

 

잠에서 깬지 얼마 안 돼서인지 아니면 저도 모르게 목이 메어와서인지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너… 아직 날 사랑하잖아. 그래서 일부러 다 무시한 거잖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맞거든?”

 

목소리의 볼륨이 조금 커졌다.

 

“아직도 집에 내 흔적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해.”

 

다 거짓말이잖아. 그렇잖아. 차마 호열의 어깨를 잡지 못한 손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호열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들바들 떨리는 백호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 옆으로 축축하게 젖어버린 티셔츠와 바지를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 비를 맞고 다니냐.”

“지금 그런 걸 걱정할 때냐?”

“친구라면… 이 정도 걱정은 할 수도 있잖아.”

“웃기지 마. 너랑 친구 안 해.”

 

날카로운 칼처럼 들어오는 말에 호열이 씁쓸하게 웃었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지나면 백호와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너무 욕심이었나.

백호는 꽉 쥔 주먹을 풀고 배어 나온 땀을 티셔츠에 닦아냈다. 축축하게 젖은 티셔츠라 손바닥은 오히려 더 젖을 뿐이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않는 듯했다.

 

“나 진짜 열심히 살았어.”

“…알고 있어.”

“네가 그걸 원할 테니까.”

 

손의 떨림이 위로 올라온 듯 백호의 목소리도 티나게 흔들렸다. 호열은 팔꿈치 아래로 늘어진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가 헤어지자고 하던 날, 너 없이 못 산다고 했던 나한테 네가 뭐라고 했어?”

“…넌 천재니까 곧 적응할 거라고.”

“앞으로는 내가 사랑할만한 세상이 올 거라고 했잖아.”

 

커다란 손이 호열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저절로 고개가 올라갔다. 희붐하게 비치는 가로등 불빛 아래 백호의 얼굴이 반쯤 밝게 빛났다.

 

“난… 그 세상을 사랑할 거야.”

“…잘됐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건 너밖에 없어. 그래서 네가 내 세상이야. 내 세상은 전부 너뿐이라 나는 널 보낼 수가 없어.”

“백호야.”

“싫다고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도 마. 너도 날 사랑하잖아.”

 

끝없는 고민의 흔적이 입술 위 진한 자국을 남겼다. 백호는 그 잇자국을 엄지로 만지며 말했다.

 

“싫다고 할 거면 차라리 말하지 마. 그냥… 가만히 있어 제발.”

 

10년 만에 마주하는 입술은 아주 축축했다. 백호는 그저 제 입술을 호열의 것에 꾸욱 누른 채 커다란 몸을 들썩였다. 두 어깨를 부여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호열은 잔뜩 찌푸려진 백호의 눈두덩이를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고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오랜 시간 세워두었던 거짓말이 와르르 무너져 더 이상은 벽을 칠 수가 없었다.

애닳는 듯 비벼지는 입술 사이로 백호의 흐느낌이 흘러들어왔다. 어깨를 꽉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백호는 고개를 비틀며 호열의 어깨 위로 무너졌다.

 

“개자식…. 받아줄 거면서.”

 

나쁜 자식,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래. 눈물에 짓눌린 목소리가 힘겹게 터져 나왔다. 이제는 절대 놔주지 않을 거라며 우는 꼴이 꼭 어릴 때와 똑같았다. 호열은 백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등허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제 없어지지 마, 제발….”

 

백호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이 정적으로 가득찼다. 흐른 세월만큼 그들의 사이에는 낯선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의 거리를 가늠했다.

백호는 조용히 호열의 얼굴을 살폈다.

 

“어떻게 지냈어.”

 

백호의 목소리는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지만 꽤 차분했고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복잡하지 않았다. 호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럭저럭.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했다. 백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호열의 손을 끌어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어떤 말들이 오가지는 않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그저 공기를 느낄 뿐이었다.

 

“네 편지들, 아직 하나도 안 읽었어.”

 

호열의 목소리는 무거웠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읽으려고 할 때마다 너무 무서웠어.”

 

백호는 아무런 말없이 호열을 바라보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답이 오지 않는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면서 그가 제 편지를 읽지 않았으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언젠가 제 마음이 가닿으리라는 믿음이었다.

 

“이제 읽을 거야?”

 

백호가 담담하게 물었다. 굳이 강요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흐르는 대로 두고 싶었다. 호열은 열린 서랍에서 조심스럽게 한 편지를 꺼내 들었다. 봉투는 이미 빛이 바랬지만 그 안에 담긴 글씨는 여전히 선명했다. 천천히 편지를 읽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한 글자, 한 문장이 호열의 마음속에 꽉 차올랐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호열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말없이 백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른 문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묵직하게 뛰는 심장소리 하나면 충분했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

“아니.”

 

호열의 물음에 백호는 즉각 답했다. 싫다는 말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했으면서. 원망이라고 해야 할까 서운함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간 그의 마음을 거부한 자신에 대한 분노일까. 복잡한 감정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양호열이. 또 이상한 생각하지.”

“뭐?”

“끝난 적도 없는데 뭘 다시 시작해.”

 

호열의 입에서 허탈함이 터져 나왔다. 단순하지만 백호가 그대로 담긴 한 문장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손을 맞잡고 조용히 그 순간을 받아들였다.

멈춘 듯했던 10년을 뒤로하고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오롯이 두 사람만의 것이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