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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h

라라

@714raranchurus

​원위 - 궤도

“인내니 기다림이니 하는 건 핑계일 뿐이야. 현재를 바꿀 능력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인 거잖아.”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야. 강백호는 그렇게 말했다. 양호열은 말이 없었다. 오래도록 그의 옆을 지킨 누군가에겐 꽤 아프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양호열은 애써 변명했다.

 

“현재를 바꾸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변화가 두려워서 말이야.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수도 있으니까.”

강백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양호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 건 변명이야.”

심장이 뜨끔했다. 강백호는 때때로 이렇게 강렬히 직관적이었다. 백호는 이번 여름방학이 끝나면 미국으로 유학을 하러 가게 된다. 부상을 딛고 이뤄낸 쾌거였다. 물론 농구 강국인 본토에 가서 성과를 이루어낼지는 알 수 없으나, 강백호라면 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백호를 떠나보내기 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양호열은 제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중이었다. 호열의 심란한 얼굴을 눈치챈 강백호가 먼저 무슨 일 있냐 물었고, 호열은 머뭇거리다 제 고민을 두루뭉술하게 털어놓았다. 강백호는 ‘이 녀석, 숨기는 게 있구만….‘ 하고 눈치챘지만, 한숨만 내쉴 뿐 추궁하지는 않았다. 전혀 몰랐는데 아주 오래 좋아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여태 말해주지 않은 건 좀 괘씸하지만 그래도 제일 먼저 저에게 상담했으니 용서할 수 있었다. 몇 년이나 기다리다니 혹자는 그 사랑이 고되고 눈물겹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강백호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봐 줄 찬스를 기다

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원한다면 쟁취해내야 하고, 찬스가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혼자 가만히 있는 걸 칭찬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호열은 생각이 많아진 듯했다. 강백호는 몇 마디 더 덧붙였다.

 

“게다가 욕심이지.”

“욕심?”

“상대방이 언제나 널 기다려주진 않을 테니까. 결국엔 네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변화하는 순간은 반드시 올 텐데. 넌 그때에도 아직 적절한 때가 아니라며 기다리고만 있을래?”

 

호열은 대답하지 못했다.

 

“답답아. 적절한 순간이 되도록 만들어야지!”

 

강백호는 문득 전국대회에서 안 선생님께 출전을 요구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크게 다쳤었지만 절대로 그 순간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 순간 없었더라면, 그때 그 결정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강백호는 없다.

 

“백호 너는 역시 굉장하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씩 웃었다. 강백호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본인이 대단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양호열은 그 말에 그저 ‘하하’ 하고 웃어주었다. 호열은 공연히 속만 더 복잡해진 것 같다고 느꼈으나 익숙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하며 화제를 돌렸다.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건 없어?”

“으음.”

 

강백호는 고민하는 듯 눈을 감았다. 농구부원들에게 축하를 받았고, 송별회도 이미 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이라며 방학 동안 신나게 놀러 다니면서도 한나 선배에게 혼나며 영어공부도 했다. 리스닝이 잘 안되는 건 조금 불안하지만, 그건 몸으로 부딪치며 익히면 된다. 농구도 원 없이 했고, 이제는 더 큰 무대에서 더 본격적인 게임을 위해 타지로 떠난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더이상 남은 미련 따위 없다. 모두 털어내고 다음으로. 강백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없다.”

언뜻 시원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에 양호열은 왠지 서러워졌다. 강백호는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아쉽다든지 불안하다든지 그런 말 한마디쯤은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건 양호열의 욕심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강백호는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다. 정작 그런 그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양호열 자신이다. 난간에 기대어 풍경을 바라보는 백호의 눈동자에 노을이 비쳤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던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떠나고 나면 양호열의 마음 한구석은 텅 빈 것처럼 허전하고 아릴 것이다. 절친한 친구가 떠나서 그렇다는 말로 변명할 수도 없을 거다. 백호가 돌아올지, 아님 쭉 그곳에서 지낼지도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만,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양호열은 불안해졌다. 좋아한다는 마음에도 유통기한이 있나? 정말로? 제 속에 남은 풋감정을 어떤 형태로 정리해야 하는가. 양호열은 유독 붉은 노을을 쳐다보며 깊게 고민했다.

 

“별을 보러 가자.”

 

시원한 바람이 살랑 불어온다. 바람에 눈살을 살짝 찌푸린 백호가 호열을 돌아보았다.

 

“그건 한번도 안 해 봤잖아. 마지막으로 별을 보러 가는거야. 낭만적이지 않냐? 용팔이랑 대남이 구식이도 함께 불러서 가자. 거기서 소원도 비는 거지. 어때?”

“그래, 마지막으로 별 보러 가자.”

 

강백호는 그렇게 말하곤 씨익 웃어 보였다. 양호열은 그의 웃음에 속절없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면서 애써 눈을 피했다.

 

***

 

 

 

별을 보러가자는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지만, 막상 진짜로 별을 관찰하려고 하니 생각보다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우선, 도시에서는 별이 잘 보이지 않으니 시골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출국을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바이크를 타고 근교로 이동을 할까 하다가도 같은 이유로 무산되었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별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망원경이 필요했는데,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이야 다들 비슷했기 때문에 구할 수 없었다. 학교 내에도 천문 부가 따로 없었고, 인근 대학교에는 망원경이 있는 것 같았지만 외부인에게 쉽사리 빌려줄 만한 장비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맨눈으로 관찰을 해야 했다. 덕분에 호열은 간만에 도서관을 드나들며 천체관찰에 관한 책을 빌려 읽었다.

 

[페르세우스 유성우]

 

우리나라에서 매년 7월 말, 8월 중순 사이에 관찰할 수 있는 유성우입니다. 스위프트-터틀 혜성에 의해 우주 공간에 흩뿌려진 먼지 부스러기가 지구 대기권과 충돌해 불타면서 유성우가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입니다.

 

양호열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고 얼른 메모해 두었다. 주의할 점은 달빛이 들지 않는 높은 곳으로 향할 것, 손전등이나 램프 등 불빛을 켜 두지 않을 것. 계속 하늘을 바라보지 말고 휴식을 취할 것. 관찰 방법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며 무슨 소원을 빌지 상상해보았다. 백호가 잘 적응하길. 저 먼 데서 다치지 않기를. 농구에서 충분히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소원들 사이사이로 백호와 했던 말이 떠올라 속이 불편해졌다. 남에게 들리지 않을 비밀스러운 소원조차 욕심대로 말하지 못하는구나. 모든 신경이 백호 네게 쏠려있다. 별이 잔뜩 쏟아질 유성우를 구경하러가는데도 오직 너를 위한 소원만 생각하고 있다니 중증이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는데도 혼자 얼굴이 붉어진 양호열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호군단의 모두와 이야기한 결과, 유성우는 학교 뒷산에서 보기로 했다. 가깝기도 하고, 꽤 높으며 주변엔 다른 건물이 없어 밤엔 어두우니 별을 구경하기엔 제격이다. 양호열 딴에는 친구들이 귀찮아할까 봐 걱정했는데 감수성이 풍부한 녀석들이라 그런지 별 관찰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기쁜 듯이 찬성했다. 불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애들이지만 이럴 땐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것 같아서 왠지 웃음이 나왔다. 백호가 떠나고 나면 가장 빈자리를 많이 느끼게 되는 건 양호열을 포함한 네 명일 것이다. 친한 친구들이니 자주 모여 자주 웃겠지만 그래서 더 생각이 날 테니까. 문득, 송별회는 백호를 위한 것이었지만 별 관찰은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무슨 소원을 빌지도 궁금했지만, 부정 탈까 걱정되어 서로 묻지 않았다. 별똥별이 셀 수 없이 많이 떨어지면 좋겠다. 모두가 놓치는 일 없이 말이다. 별을 보기 위해서 매트를 깔고 야광 시계를 보며 준비하는 사이, 백호는 나무 사이로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을 찾아서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야경을 눈에 담는 듯한 행동에 호열은 저도 모르게 강백호의 옆에 가서 서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 해?”

“새삼, 이 동네를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네.”

“모르지. 돌아오게 될지 영영 떠날지. 하나 확실한 건, 당분간은 못 온다는 거야.”

 

호열은 쓰게 웃었다. 빈말로라도 돌아오겠다는 대답이 듣고 싶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소원은 정했어?”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백호는 호열을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별말이 없었다. 아직 정하지 못했거나 아예 소원을 빌 생각이 없는 거겠지. 강백호는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 확언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게 백호답다고 생각했다. 백호의 이런 면은 농구를 하면서 더욱 두드러진 것 같다고 양호열은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스포츠란 시간을 들여서 규칙을 몸에 익히는 행위다. 공을 바닥에 튀기거나, 공을 림 안에 던져 넣는 것을 반복적으로 익히면 점수를 내기 쉬워진다. 경기에서 잘 하고 싶으면 당연하게도 평소부터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한다. 스포츠에서 우연 이란 없다. 모든 기회는 전부 평소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만 득점으로 이어진다. 주어진 기회를 득점으로 만들지 못하면 선수는 본인이 왜 코트 위에 있어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증명해야 한다. 그러니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그 단 한 번의 순간을 위해 매일을 연습으로 보내는 이들에게 어떻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백호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호열은 그의 노력과 고민을 모두 보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백호가 소원을 비는 것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그가 별을 보러 가자는데 선뜻 동의한 것은 친구들을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네가 빌 생각이 없으면, 내가 대신 빌어줄까?”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당황한 양호열은 눈을 굴리며 이유를 덧붙였다.

 

“아니, 다른 게 아니고 유성우잖아. 그럼 별똥별이 많이 떨어질 테니까 네 소원 한두 개 정도는.”

“고맙다.”

 

킥킥 소리를 내 웃은 강백호는 양호열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놓았다.

 

“근데 필요 없어. 내 소원은 내가 이룰게.”

 

그 대답에 벙찐 양호열은 이마를 문지르며 백호가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걸 멍하니 지켜보다가,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양호열의 소원은 대체 무엇인가. 그 스스로 생각해본 적 없었다. 바란 것은 있었지만 그건 모두 강백호와 관련된 소원이었고, 백호가 행복한 게 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백호는 본인의 소원은 본인이 이루겠다고 했다. 그냥 가볍게 넘겨도 될 말이었을 텐데 녀석도 참.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양호열을 보고 친구들이 말을 걸었다. 양호열은 문득, 너희는 무슨 소원을 빌 건지 정했냐고 물었다. 김대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직도 못 정한 거 아니지? 우유부단하긴’이라며 가벼운 핀잔을 주고 이내 과자를 뜯는 데 열중했다. 다른 애들은 이 대화에 관심이 없는 걸로 보아 이미 다 정했나 보다. 아직까지 갈피를 못 정한 건 양호열 혼자인 듯해 머쓱해져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는 자면 안 된다는 친구들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실은 백호가 떠나지 않길 바랐다. 물론 백호에겐 둘도 없을 기회라는 건 알았지만. 어쨌거나 강백호가 제 말을 듣고 결정을 번복하거나 할 리 없다는 걸 잘 알았고, 그에게 자신은 친구인 뿐이니, 양호열은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얌전히 지냈다. 하지만 그건 소원으로 빌기엔 너무 불순한 거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차라리. 생각하던 양호열은 이용팔이 ‘어!’ 하고 외치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떳다. 다급하게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별똥별은 이미 지나갔는지 고요했다. 아아, 하고 아쉬운 소리를 내자 백호가 못 봤냐며 웃었다. 타이밍이 영 구리다. 그 이후로 별똥별은 여러 번 떨어졌지만, 양호열은 찰나에 놓치던가, 발견해도 선뜻 소원을 빌지는 못했다. 아쉽고 분한 마음이 무색하게도 유성우가 내리는 밤하늘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아예 포기하고 가만히 누워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니 백호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서, 소원 빌었어?”

 

양호열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용팔이 조건이 너무 빡센 것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별똥별이 떨어지기 전에 속으로 세 번이나 말해야 한다니. 너무 어렵다면서. 강백호는 이용팔에게 소리내어 웃어주고는 다시 양호열을 내려다보고 조용히 입 모양으로 말했다.

 

‘다녀올게.’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올라왔으나, 양호열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공항에서 백호와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었다. 짐은 미리 부쳐두었으니, 시간에 맞춰서 탑승수속을 하러 가면 된다. 백호는 가벼운 베낭 하나만 메고 있었다. 여권을 손에 쥐고 계속 바라보던 녀석은 어쩐지 조금은 굳은 표정이었다. 양호열은 문득 지금뿐이라고 느꼈다. 이 순간이 아니면 고백할 타이밍 따위 이제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양호열은 애들의 주의가 산만해진 사이 백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흔쾌히 호열에게 따로 시간을 내주었다. 고작해야 삼십 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호열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전에 네가 얘기해준 거 기억해? 기다림이랑 인내에 대해서 말이야.”

 

강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듯 보이던 양호열의 표정은 어딘지 어두웠던 걸 기억한다. 호열은 입안이 마르는지 침을 삼키고 떨리는 눈빛으로 백호를 마주 보았다.

 

“너는 기다리는 게 싫다고 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잘 인내했다고 생각해. 그 모든 것에 의미가 없진 않다고 말야.네가 회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시간들이 전부 인내였고 그게 끝내 너라는 멋진 선수를 만든 거지.”

 

솔직히, 그냥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따로 하려고 부른 건 줄 알았던 강백호는 조금 당황했다. 그때 했던 얘기를 왜 이제 와서 다시 하는 거지. 얼굴도 이상하고. 어디 아픈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어 안색을 좀 더 살피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양호열은 웬일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몸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강백호와 시선을 마주 보았다.

 

“호열아, 너.”

“네가 그다음에 했던 말은 동의한다. 적절한 순간이 아니라면 그런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

 

강백호는 호열의 상태를 물으려다 말이 잘려서 입을 다물었다. 왠지 이 순간, 양호열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제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양호열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가렸다.

 

“그런데, 음. 대실패야. 아무래도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는 건 좀처럼 어렵더라.”

 

그가 손을 내려 다시 마주한 양호열의 눈빛은 떨림이 없이 진지했다. 양호열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너한테 배운 점이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거야. 넌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 미련 없이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남겨두지 않고, 별에 빌 소원도 없었던 거지. 너를 본받아서 나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 이 순간으로 정했다. 놓치면 진짜 평생 곱씹으며 후회할 거 같아서.”

 

양호열은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허리를 숙여 반절했다.

 

“좋아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양호열은 숙였던 허리를 세우고 천천히, 강백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백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있다가 호열의 시선을 피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는,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고는 다시 양호열을 노려보았다. 양호열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저런 반응일 줄 알았다. 대답을 바란 게 아니라며 설명하고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가자고 하려는 찰나, 강백호가 입을 열었다.

 

“양호열은 이딴 걸로 장난치는 녀석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양호열이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했다. 두려웠다. 거절의 말이 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우선은, 당신의 진심을 들려주어 감사합니다.”

 

강백호가 공손하고 진지하게 감사를 표했다. 호열은 어안이 벙벙해져 고개를 홱 올렸다. 강백호는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기는 했으나 혐오스러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호열의 머릿속엔 ‘왜?’라는 질문이 둥둥 떠올랐다. 강백호가 이어서 대답을 하려는 찰나, 친구들이 몰려와 그를 찾았다.

 

“백호야! 너 지금 들어가야 한대!”

 

강백호는 머뭇거렸으나 양호열의 걸음이 훨씬 빨랐다. 양호열은 강백호가 탑승수속을 밟아야 한다는 걸 듣자마자 빠르게 움직여 자리에서 벗어났다. 고백하지 못하고 그를 보내면 후회할 것 같아 질렀는데, 막상 거절의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무서웠다. 그냥 싫다는 말도 아닌, 정중한 언어로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백호는 진심일 것 같아서 괴로웠다. 차라리 대답을 듣지 않고 보내게 되어 다행이다. 조금 전까지는 최악의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이만한 타이밍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강백호는 이를 악물고 양호열을 쫓았다. 지레 겁먹고 도망가는 꼴에 짜증이 확 치밀었다. ‘고작 빠르게 걷는 걸로 운동선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열 받아서 핏줄이 돋았다. 강백호는 가볍게 뛰는 것만으로 손쉽게 양호열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양호열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멱살을 붙잡아 따악 하고 큰소리가 나게 이마를 들이받았다. 아픔에 눈살을 찌푸린 양호열은 이내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강백호가 그대로 이마를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양호열의 눈을 지척인 거리에서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한 상상하지 말고 기다려. 알겠어?!”

 

으름장을 놓은 강백호는 호열을 놓아주고 게이트로 뛰어가며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리라고! 아님. 가만 안 둘 테니까!”

 

양호열은 어안이 벙벙해 화끈한 이마만 문지르고 있었다. 친구들은 양호열을 쳐다보며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물었고, 호열은 멍하니 말했다.

 

“나도 몰라.”

 

강백호는 이듬해 여름방학에 다시 돌아왔다. 그의 요청으로 공항에는 양호열 혼자 마중을 나왔다. 둘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더니, 서로를 한참을 끌어안고서 놔주지 않았다. 양호열은 몰랐겠지만, 그에게 고백하면서 강백호가 돌아올 궤도를 입력하고 말았다. 서로의 마음이 변치 않는 한, 궤도가 변경되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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