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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의미

god - 난 좋아

“재미있는 거 없나.”

 

4인용 소파에 견줄 만큼 거대한 덩치를 웅크린 채 뒹굴거리던 남자는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쥐고 있던 리모컨을 내팽개쳤다. 월드클래스 슈퍼스타이자 농구천재, 리바운드의 황제라 불리던 강백호는 현재 서울 모처에서 꿈 같은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NBA 선수 생활을 마치고 멋있게 은퇴한 지도 어느덧 3년. 간간이 들어오는 방송 출연 섭외 덕에 심심하지는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이렇다 할 방송 스케줄도 없는 실정이었다.

호열이는 언제 오나. 오매불망 출근한 호열을 기다리는 꼴이 마치 한 마리의 집 지키는 강아지가 된 것만 같았다. 애꿎은 소파 위만 손톱으로 벅벅 긁던 백호는 핸드폰을 쥐었다.

 

[자기야]

[언제 와]

[호열아]

[호여라아]

 

다다다, 메신저에 목 놓아 호열을 외쳐봤지만, PC용 메신저를 끼고 사는 사무직도 아닌 호열이 재깍 답할 리 만무했다. 에잇. 백호는 핸드폰을 내팽개쳐놓고 다시 리모컨을 쥐었다. TV와 연결된 OTT 서비스까지 두루 넘나들었지만 딱히 눈길이 가는 채널이 있지는 않았다. 백수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가. 웬만한 채널은 본방으로 챙겨본 프로그램을 재방송해주고 있었다.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채널이 멈춰 선 것은 영화채널이었다. 오래 사귄 연인이 권태기를 겪는 흔한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 백호는 뭔가에 홀린 듯 영화에 빠져들었다.

 

[우리 너무 오래 만났다.]

[또 왜 그러는데?]

[이제 너한테 설레지 않아.]

 

와, 이렇게 헤어지는 거야? 너무 슬프잖아. 여자주인공 진짜 너무했네. 이제 설레지 않는단 소리는 진짜 너무했다. 어느새 찬장에서 감자칩을 꺼내든 백호는 입안 가득 과자를 씹으며 이야기에 몰입했다. 눈가에 촉촉하게 눈물방울을 달고 있는 것은 덤이었다. 백호는 나른하고 조금 찝찝해진 기분으로 과자를 씹었다. 와작, 감자칩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설레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감정으로 하게 되는 걸까. 만약에 호열이가 나한테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때는 어쩌지? 아니, 나는 호열이에게 설레고 있나?

잠시 찾아온 광고 시간. 티슈를 뽑아 눈물을 훔치고 텅 빈 과자봉지를 정리하던 백호의 눈에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은퇴를 기념하며 함께 찍은 사진. 그때부터 같이 살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같이 살게 된 기념으로 찍었다고 해도 좋을 그런 사진이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난 지도 벌써 20년, 서로의 마음을 깨닫고 연애한 지도 어느덧 10년, 자동차 정비소 사장님과 은퇴한 백수 운동선수로 함께 살게 된 지 이제 겨우 3년.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일상. 어쩌면 긴 시간 어울려 지낸 것이 관계에는 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백호야, 우리 헤어지자.”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너무 오래 만났잖아.”

 

헤어짐을 말하는 호열은 어울리지 않게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왜 헤어지자고 하는 거지? 저렇게 예쁘게 웃는 얼굴로 왜? 도대체 왜? 백호는 돌아서는 호열을 잡으려 뛰고, 또 뛰었지만 호열은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져갈 뿐, 끝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헉!”

 

백호는 경기를 일으키듯 잠에서 깼다. 뭐 이런 악몽이 다 있어.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자 이름 모를 액션영화의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까무룩 잠들었던 모양. 아무래도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건 저 영화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백호야, 나 왔다.”

 

이윽고, 반가운 목소리도 들렸다. 호열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손을 씻고는 냅다 백호에게 다가왔다. 가볍게 뺨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백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낮잠 자는 사이 꾼 개꿈이 뭐 대수인가. 이건 분명, 양호열의 손이다. 백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호열의 손을 잡고 뺨을 비벼댔다. 말랑하고 부드럽고 또, 적당히 굳은살이 박힌 그런 손.

눈을 뜨자 저를 보며 웃고 있는 호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백호는 손을 뻗어 곁에 서 있는 호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꿈이어도, 호열이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야. 말캉하면서도 단단한 배에 이마를 맞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자 익숙한 향이 코끝을 감쌌다. 호열이 늘 머금고 있는, 호열만이 낼 수 있는 그런 향기. 잠이 덜 깬 백호가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머리를 비비적거리자 호열은 이리저리 뻗친 백호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낮잠 잤어?”

“어엉, 호열아. 나 꿈꿨다.”

“무슨 꿈?”

“……음, 비밀.”

“뭐야, 그게.”

 

호열은 싱겁다는 듯 웃었다. 질문이 이어질세라 백호는 씻고 오라며 호열을 욕실로 밀어 넣고는 서둘러 앞치마를 맸다. 같이 살게 된 후, 별다른 스케줄이 없다면 저녁은 백호의 몫이었다. 호열은 그리 원하지 않았지만, 백호는 한사코 제가 하겠다며 박박 우겨댔다. 제가 만든 계란후라이 하나에도 밝게 미소 지으며 빵빵한 볼로 오물거리는 호열을 보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달궈진 후라이팬 위에 기름을 두르고, 소분해 놓은 볶음밥용 채소를 털어넣자 치지직- 맛있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피어올랐다. 호열이 헤어지자고 말한 꿈은 명백히 악몽이었다. 아직도 헤어지자고 말하는 호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백호는 일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에 몰두했다. 꿈 그거 뭐 까짓거, 이 천재가 다 이기면 돼!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씻고 나온 호열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백호에게 다가왔다. 뭐야? 볶음밥. 맛있겠다. 가벼운 백허그 후 식탁에 앉은 호열은 한층 뽀얘진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백호야, 이거 진짜 맛있다.”

 

볶음밥을 떠서 입에 밀어 넣고는 맑게 웃는 호열의 얼굴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입에 물고 있던 볶음밥을 허겁지겁 씹어 삼킨 백호는 상체를 일으켜 냅다 호열의 뺨에 뽀뽀했다. 백호의 기습 뽀뽀에 호열은 괜히 뺨을 문질렀다. 오늘따라 표현이 격하네. 귀엽기는.

 

“푸흡, 갑자기 왜 그래?”

 

호열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고, 당연하게도 뽀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이게 당연한 거라고? 양호열이 반응을 안 하잖아? 왜 나한테 뽀뽀 안 해주는 거야? 홀로 초조해진 백호는 다리를 달달 떨다가 찰싹, 허벅지를 얻어맞고 말았다.

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사이좋게 붙어서 설거지를 한 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하루 종일 소파에 붙어있던 백호에게는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호열과 함께라면 언제든 괜찮았다. 아니, 지금은 어쨌든 호열과 계속 붙어있어야만 했다. 진짜로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내가 막 예지몽을 꾼 거면 어쩌지? 함께 보려고 미뤄두었던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재생되자 호열은 지정해둔 자리처럼 백호의 품에 안겨 백호의 배를 주물렀다.

고양이를 키우면 이런 느낌일까. 골골대듯 품에 쏙 안겨있는 호열의 체온이 따끈했다. 예전엔 미지근했던 것도 같은데, 이런 것도 살면서 닮아가는 걸까. 백호는 손을 올려 호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렸다. 결 좋은 까만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머리카락을 만지면 졸리다고 했던가. 아니면 저녁을 많이 먹은 탓인가. 은근슬쩍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던 호열은 평소보다 격렬하게 뛰는 심장 소리에 의문을 품었다. 매일 같이 백호의 가슴근육을 쿠션 삼아 머리를 기댔어도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는데. 응? 백호 왜 그러지. 호열은 귓가에 들리는 백호의 심장박동 수를 세며 익숙한 듯 백호의 배를 주물렀다. 말캉, 몰캉, 으응? 한참 신나게 뱃살을 주무르던 호열이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자, 백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왜 이렇게 귀엽게 쳐다보지?

 

“백호, 너 뱃살 좀 나온 거 같은데.”

“아니? 아닌데? 아닌가?”

“맞는 거 같은데… 날씨도 시원하고 좋은데 우리 산책할까?”

“…어…, 지금?”

“나가기 싫으면 집에 있어. 나 혼자 나갔다 오지 뭐.”

 

혼자 다녀온다는 호열의 말은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산책도 나가기 싫다고 하고 뱃살도 찌고 못 생기지면… 그래서 호열이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헤어지자는 말, 꿈에서 들어도 속상한데 진짜로 들으면 더 속상하겠지? 백호는 예쁜 호열을 혼자 내보낼 수 없다며 눈물을 머금은 채 옷을 챙겨입었다.

세상에 산책 싫어하는 강아지는 없다지만 호랑이를 닮은 양호열네 빨간 털 대형견 강백호는 은퇴 후 유난히 밖으로 나가길 싫어했다. 평범하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들 체격이 좋은 미국에만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한국에 보니 제 덩치가 커도 너무 커서 잘 보인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여기는 왜 다 작은 거야! 꾸역꾸역 후드티에 몸을 구겨 넣는 백호를 지켜보던 호열은 빵빵하고 탐스러운 백호의 엉덩이를 탁탁, 치며 웃었다.

 

“아이 예쁘다~ 누구 애인인지 말도 잘 들어요~ 그치?”

 

밖으로 나서자 상쾌하다 못해 으슬으슬 춥기까지 한 공기가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백호는 춥다며 움츠러드는 호열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서둘러 주변을 살핀 호열은 인적이 보이지 않자 슬쩍,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밖에서 이렇게 티 내도 돼?”

“뭐 어때.”

 

백호는 슬며시 웃는 호열의 얼굴을 감싸 쥐고 쪽, 입술 위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이번엔 귀까지 빨개져서 주변을 살피는 호열의 작은 머리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갑자기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호열을 끌어안고 동네가 떠나가라 외쳤다.

 

“양호열 내 꺼다~!”

 

백호의 돌발행동에 호열은 어느새 품에서 벗어나 멀찍이 떨어져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가 보면 모르는 사이인 줄 알겠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호열에게로 다가간 백호는 호열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무거운 무게를 무기 삼아 질질 늘어졌다.

 

“진짜 무거워, 떨어져!”

“호열아아, 뭐야 내가 싫어졌어?”

“내가 널 왜 싫어하냐?”

 

호열은 새삼스러운 것을 묻는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하지만 떨어지라고 말했던 – 흡사 호통과도 같았던 – 호열의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싫어졌냐는 말에 아니라고 명확하게 답을 해주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꿈은 꿈일 뿐이지만 늘 엉뚱한 상상을 하는 백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백호는 입술을 부루퉁 내민 채 터덜터덜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는 한가했는데 점심때 어떤 여성분이 다녀간 뒤로는 진짜 너무 바쁜 거야.”

 

오늘 매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재잘재잘 떠들며 나란히 걷던 호열은 시원찮은 대꾸에 슬쩍 백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위하는 똥강아지라도 된 듯 입술을 부루퉁 내밀고 있는 백호의 모습에 호열은 기가 찬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야, 강백호.”

“어엉?”

 

호열은 재빠르게 손을 뻗어 백호의 툭 튀어나온 입술을 잡고 흔들었다. 으붑, 으으이? 벌어진 입술 새로 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백호는 눈썹을 한없이 팔자로 내리깔며 불쌍한 척을 했지만 호열은 입술을 쥔 손가락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너 뭐 때문에 심통 났어?”

“음… 저 그게….”

“나한테 얘기 안 해줄 거야?”

“아니 조금, 아니 그게 아니고.”

 

막상 꿈에서 니가 헤어지자 그래서 너무 슬펐다. 같은 말을 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호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꼭꼭 삼키며 말을 아꼈다. 그런 꿈을 꿨다고 말하면 호열이 진짜로 이별을 말할 수도 있지 않나? 막 저주에 걸린 것처럼?

백호가 끝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호열은 옆에서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강백호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텅 비어있는 가로수 밑 벤치에 앉은 호열은 백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백호는 추위에 약한 호열의 몸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장난하냐 강백호. 잘 생기면 다야? 오늘따라 유독 많은 사람을 상대했던 호열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아지는 말이라도 안 통하지, 인간 강백호는 말도 통하면서 대체 왜 말을 안 하는 건데?

 

“백호야, 너는 나한테 못 할 말이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대체 뭔데.”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그리고 호열도 내심 초조해졌다. 못 할 말이 있는 걸까. 큰 일이 난 건 아닐까. 호열이 다그치듯 묻자 백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갑자기 왜 울어. 호열은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손을 뻗어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물을 빠르게 훔쳐냈다.

 

“백호야, 갑자기 왜 울고 그래. 나한테 서운한 거 있어?”

“아씨! 니가 꿈에서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잖아!”

“푸흡!”

 

팡, 흡사 유전 터진 것처럼 백호의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백호는 뺨을 타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웅얼웅얼 눈물 섞인 한탄을 했다. 다 큰 남성이, 전직 농구선수라 더 거대한 남성이 산책길 벤치에 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인 걸 알고 있는데도 호열은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꿈에서 헤어지자고 했다고 그게 그렇게 서러웠던 거냐고. 호열은 치솟는 광대를 꾹꾹 눌렀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빨리 뛰는 게 아무래도 어딘가 고장난 모양이었다. 호열은 귓가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백호의 뺨을 감쌌다. 짭짤한 눈물이 스며든 입술 위에 입술이 닿았다.

 

“백호야, 나는 절대로 너한테 헤어지자고 안 해.”

“킁, 약속 꼭 지켜야 해.”

 

오늘 무슨 영화를 봤길래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해졌나. 호열은 자꾸만 위로 찢어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렸다. 강백호 진짜, 귀엽잖아. 팡, 터졌던 눈물도 어느덧 잠잠해졌다. 호열은 백호의 앞에 선 채 옷소매로 눈가를 꾹꾹 눌러 주었다.

 

“다 울었어?”

“…응.”

“우리 놀이터 갈래?”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백호의 목소리는 지하까지 슬금슬금 기어들어 갔다. 분명히 사람을 끌고 나왔는데 강아지가 잘못 끌려 나온 모양이다. 눈치를 보는 것도 하는 짓도 대형견이 따로 없었다. 호열은 뜨끈하고 커다란 손을 끌어다 손에 꼭 쥐고,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로 향했다. 이제는 옛 감성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최신식 놀이터였다. 호열은 정찰하듯 놀이터를 살펴본 뒤, 백호의 손을 끌어다가 시소 위에 앉혔다. 백호라면 그네를 더 좋아하겠지만, 그네는 끊어질지도 모르니까. 호열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시소 위에 앉은 백호는 제 앞에 서 있는 호열을 올려다보았다.

 

“왜 나만 앉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호열은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은 채, 백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가까이 다가온 호열의 얼굴에 백호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갔다.

 

“뭐냐아.”

“백호야.”

“어엉.”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서운했어?”

 

기껏 그쳐놓은 눈물이건만. 헤어지자고 했단 말을 다시 상기하니 백호는 뭐가 또 서러워졌는지 미간을 구기며 턱으로는 호두과자를 만들었다. 호열은 다시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얼굴 정면에서 대놓고 웃어버리는 호열의 행동에 백호는 울먹임을 더해 볼멘소리를 냈다.

 

“너어! 킁, 뭐가 웃기냐!”

 

백호의 표정은 점점 더 구겨졌다. 뭘 이렇게 갑자기 서러워하고 그래. 호열은 웃으며 백호가 앉은 시소의 앞자리에 백호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겨우 웃음을 멈춘 호열은 손을 뻗어 백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보드라운 손이 말캉말캉 슬라임을 만지듯 얼굴을 주물러대자 백호는 자유분방하게 벌어진 입으로 소리를 냈다.

 

“느어, 이흔다후 애아 훌릴 주 아라?(너 이런다고 내가 풀릴 줄 알아?)”

 

백호의 항의에 주물 거리는 걸 멈춘 호열은 쪽 하고 백호의 입술 위에 도장을 찍었다.

 

“나는 백호야, 너랑 있으면 매일매일 행복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즐겁고 행복해. 일년이 하루 같아. 세상에다가 대놓고 강백호 내 거라고 찜꽁하고 싶어. 백호야, 우리 영원히 곁에서 함께하기로 약속 했잖아. 그걸로 부족해?”

“우씨,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그랬단 말이야. 내가 어? 변해서 킁, 호열이 니가 나 싫어지면 나 어떻게 하냐. 난 이제 양호열 없으면 못 사는데!”

“푸흡, 백호야. 나는 니가 살쪄도 좋고 농구 안 해도 좋고 바보여도 좋고 다 좋아. 너라서 좋은 거야. 알았냐?”

 

그런가.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떻게 20년을 넘게 매일 서로에게 반할 수 있을까. 어제의 강백호보다, 어제의 양호열보다 오늘의 서로가 더 사랑스럽다면, 그렇다면. 다시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백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호열의 볼을 톡톡 건드리며 웃었다.

 

“너 이제 나한테 안 설레?”

“뭐… 가끔 설레지, 맨날 설렐 순 없잖아.”

“…왜?”

“맨날 설레면 나 심장 터져서 일찍 죽을걸?”

“호열아, 있지. 나는 맨날 설레. 널 보면 매일 처음 같아.”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늘 가까이 붙어있어서, 익숙해지고 당연해져서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강백호는 양호열을, 양호열은 강백호를 여전히 설레게 했다. 영원한 건 절대 없다지만,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백호는 손아귀에 쥔 호열의 손을 쪼물거렸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남들이 볼 때야 건장한 청년의 손이겠지만, 백호의 눈에는 그저 작고 가늘고 귀여운 손가락이었다. 백호는 손에 쥔 보물이 달아날까 싶어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입술을 묻었다. 조그만 시소에 앉아 여기저기 뽀뽀를 받고 있으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호열은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쓴 백호의 턱을 쥐어 올렸다. 백호야, 나 봐봐. 허공에서 마주친 눈이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우리 첫 키스 놀이터에서 했는데, 기억나?”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호열의 모습에, 백호는 호열의 얼굴을 움켜쥐고 급하게 입술을 포갰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뜨겁게 달라붙는 입술 사이를 비집고 혀가 엉겼다. 호열도 기다렸다는 듯 백호의 손목을 움켜쥐며 말캉한 입술을 핥았다. 떨어졌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치열을 훑고 여린 입속을 헤집으며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교복을 입고 있던 열아홉 살 가을의 첫키스, 꼭 그때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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