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이미지를 누르시면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ロクデナシ - 愛が灯る.jpg

그의 눈동자 안에 사랑이

​평범

@Commonness_HADA

ロクデナシ - 愛が灯る

생각해 보면 양호열이 감정을 드러내는 원인은 대부분 강백호였다. 양호열이 들으면 ‘너, 그 얘기 백호에게 말했니?’라며 옷소매를 올리고 다가올 것 같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나.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에. 혼자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강백호의 귓가로 아이들이 소곤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양호열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대체적인 말들이 ‘잘 웃고 있지만 왜인지 다가가기는 힘든 아이’로 의견들이 모아져서. 그 이야기를 들어버린 강백호는 어이가 없어 상체를 벌떡 들며 뭣?! 외쳤다가 깜짝 놀란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도망가 버렸다. 대답도 듣지 못하고 교실에 홀로 남겨진 백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뭐가 다가가기 힘들다는 거지? 웃고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그리고 그날 하교 때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백 편지를 쓸 건데 도와달라고 하니 역시나 기꺼이 집으로 같이 와준 양호열이다. 이렇게 착한데 말이야! 걔들은 아무것도 몰라!

​​

“호열아.”

“응?”

 

집에 함께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벗고 낡은 테이블에 쭈그리고 앉아 고백 편지를 적던 강백호는 머릿속에 맴돌던 아까의 일을 툭 말했다.

 

“다른 애들이 호열이 넌 다가가기 힘들대.”

 

순간 강백호는 말 실수했다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 주변인들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나쁜 말들을 돌처럼 던지던 순간이 떠올랐다. 상처 받았을까? 힐긋 본 호열의 얼굴은 별다른 구겨짐이 없다. 그저 백호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을 뿐이다.

 

“그래?”

“…웅.”

 

그러니까 정말 이해가 안 돼.

이렇게 잘 웃는데.

 

“왜 그러지? 넌 나랑 다르게 얼굴이 무섭지도 않잖아. 잘 웃고.”

“그런가?”

“다들 널 몰라서 그래. 너랑 친해지면 진짜 재미있고, 잘해주는데.”

 

양호열은 편지 오탈자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딱히 다른 애들이랑 친하게 지낼 생각 없어. 여기, 글자 틀렸다.”

“눗!”

 

이상할 정도로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아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 어린 백호를 바라보던 어린 호열의 눈동자는 까맣고 잔잔한 밤바다 같았다. 그런 양호열이 분노한 날이 풋내기 농구맨 강백호를 위해 나선 때였고.

 

“호열아.”

“응?”

“……퇴원해도 된대.”

 

주어는 없지만 뜻은 전해졌다.

간병인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호열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나 이거 처음 말하는 거야’, 라는 말이 채 맺히기도 전에 본 양호열의 얼굴은 강백호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강백호, 이 천재는 직감했다.

이 순간을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러니까 그저 웃는 얼굴일 뿐인데 평소와 달랐다. 온 세상의 기쁨이 다 깃든 표정이었다.

병실 침대에 누운 강백호를 내려다보며 양호열은 뺨까지 붉게 물들이며 그렇게 활짝 웃었다. 휘어진 눈매 끝에 물방울이 맺힌다. 그렇게 조금씩 똑똑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점점 굵어져 진주알이 같이 뚝뚝 흐른다.

이렇게 감정이 요동치는 양호열은 처음이다. 당황한 강백호는 몸을 일으켜 호열의 어깨에 손을 올렸는데 얇은 셔츠 밑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낯설다. 항상 미지근한, 어떤 때에는 차가운 쪽에 가까웠던 호열의 체온이 뜨겁다. 고개를 자꾸 숙이려고 해서 손을 뻗어 양호열의 양 뺨을 잡았다. 억지로 들어 올린 낯빛이 참으로 붉다. 사람이 너무 울면 열이 오른다는데 그런 것일까. 그런 호열의 얼굴을 보는데 괜스레 기분이 간질거리고 자신까지 열이 옮은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호열을 껴안았던 그 저녁에.

강백호는 양호열의 눈동자 안에 무언가를 봤던 것 같다.

그의 눈동자 안에 사랑이

 

강백호는 천재다.

유감스럽게도 타칭이 아니라 자칭. 그리고 천재는 어느 날 신비하지만, 쓸모없는 능력이 하나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눗?”

 

처음 깨달은 순간은 점심시간의 옥상에서였다. 소시지 빵을 우적우적 씹는 이용팔의 주변에 묘하게 핑크색 빛깔이 맴도는 것을 보고 강백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안 어울리게 핑크빛으로 물든 이용팔, 그리고 그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빵과 우유를 먹는 노구식과 김대남.

이 두 사람의 성격상 핑크빛에 둘러싸인 이용팔을 보고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다. 전력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마구 놀릴 텐데.

 

“…용팔이, 너.”

“엉?”

 

발광 팔찌라도 찼냐? 아니면 땅에서 보석이라도 주웠냐? 이상한 연기를 태우고 있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뭐라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던 강백호는 결국.

 

“핑크새핵?”

 

요상한 단어로 툭 튀어나와 버렸다.

 

“어-엉?”

 

세 사람의 눈썹이 올라간다. 쥐 죽은 듯 고요해진 상황에 그는 깨달았다. 진짜 쟤네 안 보이나? 도대체 뭐야 저거?

한참 강백호의 질문을 떠올리던 이용팔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제 바지춤을 살핀다.

 

“보여?!”

 

두툼한 뱃살 아래로 드러난 바지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팽팽해져 있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수많은 교복 바지 중 저 바지가 이용팔에게 왔을까, 바지가 불쌍하다고 느껴버린 강백호다.

 

“아씨 바지가 작아졌더라니! 나 오늘 팬티 핑크 입은 거 어떻게 알았냐, 보였어?”

“미-친. 밥 먹는데 진짜 알고 싶지 않은 정보 감사합니다.”

“싸나이 취향 확실하네. 하지만 역겨워.”

“…후눙.”

 

눈 비비고 보아도 용팔의 주변에만 핑크빛이다. 혹시 자신이 헛걸 보는 걸까. 이때까지만 해도 강백호는 그냥 잠깐 무지개처럼 신묘한 현상이 이용팔에게 머문 건가, 생각했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은 알지만, 이렇게라도 억지로 이해하려 했었는데 기이한 현상은 또다시 보이게 된다.

두 번째는 송태섭이었다. 자신의 자세를 봐주던 송태섭의 눈동자 속에 연분홍의 작은 무언가가 있는 것이 보여서 '송꼬추, 먼지 들어갔다'라며 그것을 떼 주려다 그대로 그의 두 눈을 찔러버렸다.

꺄아아아악! 양 눈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던 송태섭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강백호에게 달려들었고, 이달재는 그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후눗! 아니, 그게 아니라! 눈 속에 뭐가 있다니까?”

“뭐가 있는데!”

 

고개를 숙여 송태섭의 눈동자를 다시 보자 역시나 있다.

아주 작은.

 

“하트?”

“하트.”

 

백호의 말에 이달재가 가져다준 손거울에는 벌겋게 충혈된 안구만 보여서, 송태섭의 분노는 더 커졌다. 이젠 거짓말까지 해?!

 

“눗! 거짓말 아니야! 진짜 안 보여? 여기 있잖아! 하트!”

“피눈물 흘릴 것 같은 내 안구만 보인다! 너 이리 안 와?!”

 

주변의 반응을 보니 눈동자 속 하트가 보이는 사람은 또 강백호뿐인 것 같다.

용팔의 몸을 감싼 핑크빛. 그리고 송태섭의 눈동자에 박혀있는 저 작은 하트. 갑자기 왜 자신에게 남들은 안 보이는 이상한 것들이 보이는지 당황스러웠다.

아, 그러니까. 환각이 보일 때는 어디로 가야 하지? 이것도 등 부상의 부작용인가?

송태섭에게 한참 혼난 후-강백호, 너 진짜 진지하게 안 할 거야? 복귀하고 정신이 아주 딴 데로 가 있지?!- 벌로 기초 드리블 자세를 연습하던 강백호는 요즘 다시 운동을 시작하고 힘들어서 헛것이 잠시 보이는 건가?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 가서 푹 쉬면 분명 나을 것이다. 잘 먹고 푹 자면 다 없어질 거야.

 

“후누?

 

그리고 이 기현상의 의문은 의외로 빨리 해결되었다.

다음날 등굣길을 걷던 강백호는 한 남녀 커플을 발견했다. 두 손을 꼭 잡고 등교하는 커플을 보고 부럽다, 생각하던 그때. 그 두 사람의 주변이, 어제 이용팔에게 봤었던 핑크빛 기류가 맴도는 것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후다닥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끼야악! 불곰처럼 나타나 앞길을 막은 양아치에 놀라 소리 지르는 두 사람이었으나, 남이 놀라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그는 똑똑히 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 안에도 하트가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하트가 눈동자 안에 있었다.

-

“용팔이 너, 사귀는 사람 있지?”

 

점심시간의 옥상에서 강백호가 던진 말은 갑작스럽고 꽤 파격적이었다. 일단 김대남과 노구식이 그의 말을 듣자마자 켁? 하며 황당한 시선을 던졌으니까.

 

“갑자기?”

“뭔 헛소리야? 있겠냐?”

“어. 있는데.”

“왜 있는데?!”

 

이용팔의 담담한 대답에 더 놀란 김대남이다. 노구식도 콧수염을 쓸며 흥미롭다는 눈빛이었다. 잠깐의 소란이 지나가고 주변이 좀 진정되자 이용팔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강백호. 어떻게 알았어? 숨기고 있었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잖아! 이용팔이 네가 어떻게 날 두고 떠나!? 그런다고 네가 잘 살 것 같아?! 날 버리고 가면 십 리도 못가 발병 날게야!”

“바람 난 남편 취급하지 마!”

“어우 정신 사나워.”

 

아침에 마주친 커플로 인해 그 의문이 확신으로 굳혀진 덕분이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를 저 멀리 날려버린 강백호라도 깨닫는 것이다. 저 하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거구나. 그리고 사랑이 이루어지면 주변에 핑크빛 기운이 도는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강백호는 그대로 등굣길 교문에 서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지켜보았다. 하트가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생각보다 눈동자에 하트가 박혀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몸 주변이 분홍빛으로 감도는 학생들도 종종 보였다.

그렇게 눈동자를 보려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서 있다가 학생주임에게 애들 위협한다고 혼난 그는 교실로 들어와서도 관찰을 이어갔다.

하트의 크기는 다양했다. 동공 가득 하트로 찬 이가 있는가 하면, 손톱만큼 작은 하트가 자리 잡은 눈동자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옥상에서 만난 용팔이 안경을 닦으려고 벗은 순간 또 봐 버리고 만 것이다. 아주 작은 눈동자 속에 박힌 하트를.

이렇게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세 사람은 당장 강백호를 끌고 병원에 달려갈 것이다. 시합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애가 아주 끝내주는 환각을 본다면서. 그러니 절대 솔직하게는 말 못 한다.

강백호는 뱉지 못한 말들을 꾹꾹 단팥빵과 함께 씹어먹다가 허전한 옆자리를 본다.

오늘도 역시나 없다.

 

“호열이 오늘도 안 와?”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점심시간이 되어 찾아간 호열은 갈 곳이 있다며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가뜩이나 2학년이 된 이후로 서로 다른 반이 된 터라 1학년 때만큼 붙어있기 힘든데. 유일하게 점심시간이 얼굴 볼 때였는데 자꾸 어긋나버린다.

낄낄거리는 이용팔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던 대남은 강백호의 말에 고개를 찌푸렸다.

 

“양호열 요즘 바쁘잖아.”

“왜?”

“아, 그 여자애?”

“오늘도 뭐 부탁했지?”

 

이미 강백호 외 구식, 대남, 용팔은 상황을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뭔데? 여자애가 누군데? 이어지는 물음에 노구식이 대답했다.

 

“호열이가 너한테 말하지 말랬는데.”

“왜!? 왜 나한테 말 안 해!?”

“…이럴까 봐.”

“같은 반 여자애가 자꾸 호열이를 부른대. 책을 옮겨달라고 하던가. 같이 교무실 가자고 하던가.”

“뭐야 별일 아니잖아.”

“별일 아니긴. 딱 봐도 별일이지.”

 

김대남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킨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김대남은 호기롭게 말했다.

 

“눈에 보인다고. 그 여자애가 호열이를 좋아하는 게. 양호열을 보는 눈동자에 하트가 딱 있던데 뭐.”

 

하트.

씹던 빵이 모래같이 쓰게 느껴진다. 가슴이 쿡 무언가 박힌 거처럼 불쾌함이 올라왔다. 호열이가 누군가에게 시선을 보낼 때. 그 초승달같이 휘어지는 눈매 속 눈동자에.

그 눈동자에 사랑이 있다면.

순간 병실에서 양호열을 껴안았을 때가 떠올랐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웃고 울던 그 모습이 떠올라 강백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열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양호열의 눈동자에도 하트가 있을까.

 

-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건물 뒤쪽 교정 벤치에 남녀가 앉아 있다.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양호열과 그 옆에 체구가 작은 여학생이다. 조금 곱슬곱슬한 단발머리에 동그란 눈동자. 멀리서 보아도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하트가 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호열에게 향한다.

강백호는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벽에 딱 붙어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엿듣는 것은 매우 나쁜 일이지만 강백호도 눈치가 있었다.

 

“나, 너 좋아해, 호열아.”

 

아무리 눈치를 밥 말아 먹어도 여학생의 고백 순간에 뛰쳐나가는 짓은 못 한다고. 타이밍을 잘 못 잡아서 이렇게 숨어 엿듣는 꼴이 되어버렸다.

왜인지 심장이 쿵쿵 뛴다.

자신에게 고백한 것도 아닌데도 심장이 이렇게 뛰다니.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기분 좋은 울림이 아니라 잔뜩 긴장되어 불쾌하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다. 왜,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강백호는 자신의 가슴께를 주먹으로 통통 치며 진정하려 숨을 후- 내쉴 때, 귓가에 호열의 대답이 들려왔다.

 

“미안해.”

 

돌린 시야에 호열이 제 옆 앉은 여학생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옆에서 보인 얼굴은 초승달 같은 눈매가 곱게 접히며 입가가 호선을 그리어 더없이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고백해 줘서 정말 고맙지만, 난 아직 누군가와 사귀는 건 힘들 것 같아.”

“아…….”

“정말 미안해.”

 

누가 저 거절의 대답이 그 해동 중학교 싸움짱이라 불리던 이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할까.

그리고 양호열이 고백을 거절하는 순간 강백호는 여학생의 눈동자 속 하트가 파삭,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사랑이 저렇게 과자 부서지듯 부서지는구나.

솔직히 대답해 줘서 고맙다며 울음을 꾹 참은 얼굴로 여학생이 자리를 떠나자, 양호열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학생이 자리를 떠나고도 한참 앉아 있던 호열은 교실로 돌아가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가 멀리서 강백호를 발견했다. 커다란 몸을 벽 뒤로 숨기려 낑낑거리면서도 그 튀는 붉은 머리를 숨길 생각은 못 했는지 빼꼼히 나온 붉은 머리가 보인다. 호열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야, 백호야.

 

“거기서 뭐 해?”

 

강백호의 어깨가 크게 튄다.

 

“누, 누웃.”

 

자신은 딱히 상관없었지만 함께 있었던 여학생에겐 실례라고 생각해 좀 다그치려고 했으나, 호열을 바라보는 그 얼굴이 영락없는 사고 친 강아지 같아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저 호열은 고개를 까딱이며 그를 불렀다. 백호야.

 

“수업 시작하겠다. 교실로 가야지.”

 

민망함에 후다닥 뛰어나와 양호열 옆에 선 강백호는 변명하려 호열을 바라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양호열의 양 뺨을 잡아 자기 얼굴로 끌어당겼다.

 

“억!?”

 

커다란 손에 볼을 눌린 양호열이 당황해 눈동자가 커지는데, 강백호의 눈매가 가느다래진다.

 

“……있네.”

 

양호열의 눈동자 안에.

붉은색 하트가 있다.

 

-

 

양호열의 눈동자에 하트가 있다.

그것도 엄청 짙은 빨강. 엄청나게 커다란 크기의 하트가. 확실한 건 아마도 이 학교를 통틀어도 양호열의 눈동자 속 하트보다 큰 것은 없을 것이다. 신기하네. 양호열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게 클 수 있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왜 나한테 이야기는 안 한 건데? 내가 여태까지 고백한 여자분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 당연히 엄청나게 친한 우리에겐, 아니 하다못해 나에겐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호열이 자식. 의리가 없어!

……의리가.

호열의 눈동자에 하트를 발견한 이후부터 왜인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농구할 때도 집중 못 한다며 송태섭에게 잔뜩 혼났던 강백호는 아르바이트가 없어서 자신을 기다리던 양호열을 흘겨보았다. 다 양호열 때문이야. 왜 나한테 비밀 같은 걸 만든 거야! 이럴 거면 들키지나 말던가! 사실 지금까지 전혀 몰랐지만! 하트가 보이는 바람에 알게 된 거지만! 그래도 다 양호열이 나빠.

 

“백호야.”

 

양호열이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왜인지 양호열 옆에 다정히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호열이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했더라? 단발머리? 긴 생머리? 양호열처럼 조용히 미소 짓는 사람일까. 그럼, 그 사람은 웃을 때 초승달처럼 눈매가 휘어지고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는 그런 예쁜 사람이겠다. 키가 큰 사람을 좋아할까? 아니면 작고 귀여운 사람? 청순하거나 섹시하거나. 도대체 어떤 여자를 좋아하지?

 

“으음. 여보세요? 강백호?”

 

생각해 보면 호열은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 같다. 구식, 대남, 용팔이 어디선가 가져온 성인 잡지를 펼쳤을 때도 크게 흥미 없지 않았나.

정말 호열이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응? 어떤 사람이냐니?”

 

엇.

강백호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양호열과 같이 하교하고 있는 와중에 저도 모르게 생각이 말로 나왔나 보다. 아! 이게 다 양호열 때문이야!

양호열은 갑작스러운 이상형 질문에 동그랗게 뜬 눈만 깜빡인다.

 

“딱히 없는데.”

“후눗! 진짜?”

 

아닌데. 눈에 하트까지 달고 있는 애가 이상형이 없을 리가.

 

“그런 거 있잖아. 키가 작고 피부가 하얗고, 단정하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좋다던가.”

“그건 네 취향이잖아.”

“아무튼 넌 어떤 여자가 좋아?”

“……여자.”

 

발걸음을 멈춘 호열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앞서가던 백호는 호열이 좀처럼 따라오지 않자, 뒤를 돌아본다. ‘왜 그래?’ 물어도 좀처럼 대답이 없던 호열은 발걸음을 옮겨 강백호에게 다가온다.

 

“그냥. 키가 크고….”

“오? 오오. 키 큰 사람이 좋아?”

“인상이, 날카로웠으면 좋겠고.”

“그래? 의외네.”

“건강한, 사람이 좋아.”

 

뚜벅뚜벅 걸어와 강백호 앞에 선 호열은 그를 똑바로 바라본다. 호열의 눈빛은 여전히 검고, 잔잔해 보이지만 역시나 하트가 있다. 크고 붉은색의 하트.

누굴까. 호열이가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강백호는 머리를 긁적인다.

 

“누우. 건강이 안 좋은 사람보단 당연히 건강한 사람이 좋긴 하지만. 뭔가 되게 두루뭉술하네.”

“……그런가.”

 

키가 크고 인상이 날카롭고 건강한 사람.

진짜 누구지.

무언가 양호열이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떼었을 때 강백호의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밀려오는 배고픔에 궁금증이 희미해지고, 호열은 하하! 웃는다.

 

“집에 가는 길에 밥이나 먹을까?”

“좋아!”

 

뭐, 언젠가 나타나겠지, 호열이의 이상형.

 

-

 

근데 그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조, 조조, 좋아, 합니다.”

“…….”

 

있다. 진짜 양호열의 이상형.

키가 크고, 인상이 날카롭고, 건강한 사람.

근데 문제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거지.

한동안 호열을 붙잡았던 여학생이 이제 없으니 괜찮겠지, 했는데, 오늘도 점심시간에 일이 있다며 자리 비운 양호열을 찾아 헤매던 강백호는 또다시 교정 벤치 앞에 서 있는 호열을 발견했다.

뭐지? 또 고백인가? 여기가 무슨 유명한 고백의 장소인가, 다들 여기서 고백하네. 이번엔 또 어떤 여학생인가 싶어 호열의 앞에 선 이를 봤는데 생각보다 키가 매우 크다. 키 큰 여학생이라고 하기엔 머리가 까까머리다. 눈을 비비고 쳐다보아도 호열의 앞에 서서 잔뜩 붉어진 얼굴로 편지를 건네주는 이는 남자다. 한눈에 봐도 덩치가 꽤 큰 남자. 게다가 입고 있는 유니폼을 보니 야구부인 것 같다.

 

“……어, 나를?”

“네, 네!”

 

…무슨?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가 있나? 장난인가, 싶었지만 멀리서 봐도 얼굴이 진짜 피가 나나 싶을 정도로 붉은 얼굴인데.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이 덜덜덜 떨리는 게 멀리서도 보인다.

호열이는 화를 내려나? 장난하지 말라고 하려나? 같은 남자가 고백한다니 기분 나쁘지 않아?

그런데 편지를 받는 그의 얼굴이 뭔가 이상하다.

 

“…고마워.”

 

전에 고백했던 여자애랑은 다른 분위기다.

진짜로, 뭔가. 다르다.

 

“고, 고백 받아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편지까지 쓴 거야?”

“네, 네! 제, 가 지금 사실 너무 긴장되어서! 제 마음을, 잘 전달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야구부 군기가 꽤 엄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딱딱한 존대를 꼬박꼬박하는 그 남학생은 식은땀까지 흘린다. 전혀 멋지지도 않고 어쩌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만큼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만.

호열은 작은 하트 스티커로 봉해진 편지를 바라보며 살포시 웃는다.

 

“대단하네.”

“예? 대단, 예에.……대, 답은 나중에. 나중에 해 주셔도. 아니! 지금 거절하셔도!”

 

바람이 분다.

이마로 살짝 내린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호열이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생각 좀 해 봐도 될까?”

 

당연히 단번에 거절하리라 생각했던 건지 호열의 말에 야구부 학생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생각해 보겠다는 건 긍정적일 수 있다는 말이고, 그렇게 되면 호열이는 저 남자애랑 사귈 수 있다는 건가? 남자랑 남자가 사귈 수 있어? 호열이는 그럼 저 애가 취향이라는 거야? 그런데 호열이 이미 눈동자 속에 하트가 있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고백한 저 남자애랑 사귄다는 건가? 그럴 수가 있는 건가.

강백호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머리가 깨진 것 같다. 그럼, 호열이는 이제 남자 친구? 가 생기는 건가?

이상해. 이상해. 당연히 여자애를 좋아할 줄 알았다고. 키 크고, 인상이 날카롭고, 건강한 사람. 그런 사람이 좋아?

키는 얼마나 커야 하는데? 190cm가 넘어야 키가 큰 거야? 인상이 얼마나 날카로워야 하는데? 조폭들처럼 사납게 생겨야 하는 건가? 건강한 건 얼마나 건강해야 해? 프로 운동선수만큼?

 

그런데.

 

나도 이제 재활 끝나서 건강한 거 아닌가?

나도 꽤 키 큰데.

얼굴도 이 정도면….

 

“……?”

 

뚜벅뚜벅 걸어가던 강백호는 그대로 머리를 벽에 박아 버렸다.

 

-

 

“……왜 저러는 거 같아요?”

“모르겠는데. 체했나?”

“저놈이? 차라리 식중독에 걸린 게 더 신빙성 있네요.”

 

포카리스웨트를 마시던 정대만은 정신이 나간 듯 비실거리며 공을 튕기는 강백호를 바라본다. 대학에 진학한 정대만이 오랜만에 시간을 내 북산 고등학교에 놀러 왔다. 일단 대외적으로 적은 이유는 <후배 지도>였지만, 실제는 후배들과 노가리 까느라 바빴던 정대만은 체육관에 들어오는 강백호를 보고 오랜만이라고 인사하려다가 이마가 까져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덕분에 한나와 소연이가 뛰어와서 강백호를 치료해 줬지만, 강백호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아까부터 불러도 애가 반응도 없고,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질 않나. 이상해. 확실히 이상한데.

기어이 연습경기에서 이호식에게 어이없게 공을 뺏기는 꼴은 본 정대만은 강백호를 끌고 나왔다. 강백호 대신 오중식이 들어가 연습경기는 재개되었고, 정대만과 송태섭이 그를 체육관 밖으로 끌고 나왔다.

 

“뭔데?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미안.”

“야, 잘못 한 건 알고 있어? 강백호, 정신 안 차려? 대회 안 나갈 거야?”

“야야, 그만그만. 잠깐 음료수라도 먹자. 내가 살게.”

 

정대만의 중재에 송태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 편하지. 두들겨 패던지, 벌을 주면 되니까. 저렇게 조개처럼 입 꾹 닫고 있으면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부원이 ‘나 오늘 무슨 일 있어요’라고 티를 팍팍 내면 주장이 해결을 해줘야 하는 건가. 치수 선배가 있을 때는 어땠지. 문제가 생기면 준호 선배가 중재해 주셨었는데. 하. 주장 어렵다.

정대만과 송태섭은 강백호를 학교 교정으로 끌고 갔다. 장소에 다다르자, 강백호가 눈에 띄게 주변을 살핀다. 뭐지?

 

“야, 여기 일단 앉아봐.”

“……꼭 여기서 말해야 해?”

“여기가 사람도 없고, 의자도 있잖아.”

“누우.”

 

남자 셋이 벤치에 앉으니 좁군.

송태섭은 정대만이 사준 음료는 입도 안 대고, 입술만 삐죽 내밀고 있는 강백호의 어깨를 잡았다.

 

“강백호. 고민이 있으면 말해봐. 들어 줄게.”

“너는 무슨 삥 뜯는 날라리처럼 말하냐.”

“뭐가요. 최대한 친절하게 말한 건데.”

 

옆에서 투닥거리든 말던 한참 우물쭈물하던 강백호는 드디어 입을 뗐다.

 

“사랑이란 거.”

“응?”

“엥?”

 

갑자기 사랑을 말한다.

송태섭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가고 정대만도 턱을 괴고 인상을 찌푸렸으나, 자신들의 후배가 하는 말을 끊지 않고 그저 귀를 기울였다.

 

“그으. 그. 나, 남자끼리도, 할 수 있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주제가 던져졌다.

 

“남자끼리?”

“동성연애?”

“엉? 어엉. 그, 이상하지 않나?”

 

애가 어디서 뭘 봤나.

정대만과 송태섭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뭐라고 이야기해요?'

'뭐가.'

'아니, 할 수는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 근데 얘는 갑자기 왜 이런 걸 물어보냐?'

'나도 모르죠, 그런데 어떻게 설명해야 해요?'

'뭘?'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애한테 뭐라고 설명을 해줘야 하냐고요.'

'아, 오케이. 잘 봐봐.'

송태섭이랑 속닥이던 정대만은 흠흠, 목을 가다듬는다.

 

“야, 강백호.”

“눙.”

“뭐가 이상하냐?”

 

다짜고짜 반박? 송태섭은 이마를 짚었다. 그럼에도 정대만은 강백호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여자든 남자든 외계인이든 좋아하는 게 틀린 건 아니잖아?”

“외계인 좋아한 적 없어. 그리고 외계인은 없다고. 대만 군 바보야?”

“뭐?! 외계인이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에, 대만 선배는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만! 주제가 엇나가잖아! 비유라고! 하지만 외계인은 있다고 생각해. 큼! 아무튼 그르니까. 좋아하는 게 내 맘대로 되냐? 저절로 눈길이 가버리잖아. 그 사람이 딱 들어와서 신경 쓰이고, 자꾸 생각나니까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거지. 그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연상인지 연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말이야.”

“누웅.”

 

정대만은 흉터가 남은 턱 쪽을 손으로 쓸어올린다.

 

“사랑에 틀림이 있나? 이성은 맞고, 동성은 틀려? 그걸 누가 정해? 종교? 학교? 사회?”

“모, 몰라.”

“그치? 아무도 몰라.”

“…….”

“그러니까, 할 수 있다고. 남자끼리든, 여자끼리든, 남녀든. 이상한 거 아냐.”

 

대상을 상관 않고 혐오부터 드러내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정대만의 말에 송태섭의 눈썹이 가라앉는다. 남녀칠세부동석 외치면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이딴 소리 지껄이는 꼰대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엄청나게 열려 있네. 송태섭은 제 뺨을 긁적이다가 강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후배다. 정대만처럼 자기 생각을 최대한 솔직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야, 강백호. 나 곧 미국 가는 거 알지?”

“응.”

“미국은 엄청 넓은 나라인 건 알지?”

“눗, 당연하지. 이 천재가 모를 줄 알아?”

“그래그래. 그리고 이 세상은 한국과 미국만 있는 게 아니잖아? 더 넓은 세상이 있어. 수많은 나라, 수많은 사람. 이성과의 사랑이든 동성과의 사랑이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곳들도 많다, 이거야. 대만 선배 말처럼 남자끼리도 뭐, 사랑할 수 있지. 결혼식도 하고.”

“누웅.”

 

그럴 수도 있다.

강백호는 고백을 받는 양호열을 떠올렸다. 야구부 후배의 고백 편지를 쥐고 미소 지으며 생각을 해 보겠다고 말했던 양호열. 어쩌면 양호열은 그 남자애의 고백을 정말 받아 줄까.

강백호의 표정이 더 이상해진다.

뭐야, 표정 왜 저래? 잘 전달된 게 맞나? 송태섭은 음료를 마시며 주장 노릇 어렵다고 생각한다. 치수 선배와 준호 선배가 보고 싶다. 지금쯤 대학교 레포트에 파묻혀 있는 그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분명 같이 레포트에 파묻혀 있어야 할 작자는 정작 제 옆에서 웃으며 강백호의 어깨를 두들긴다. 저 사람은 대학생이 되어도 어찌 변한 게 없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그건 말 못 해.”

 

다시 조개가 입을 다문 듯 입을 꾹 다무는 강백호를 보고 송태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할 말은 다 끝났으니, 굳이 원인을 들을 필요는 없지.

 

“뭐, 그래. 음료 안 먹을 거면 이제 일어나. 대만 선배 왔을 때 네 슛 폼 좀 다시 보자.”

“뭐야, 나는 슛 폼 측정기야?”

“아주 기능 좋은 측정기죠.”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네.”

“칭찬이에요.”

 

셋이 다시 체육관에 돌아가니, 체육관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양호열이다. 납작하게 눌린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체육관 안을 보고 있던 양호열은 뒤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돌렸다가 강백호 이마에 붙여진 반창고를 보고 빠르게 다가온다.

 

“이마 왜 그래?”

“누, 으.”

 

저 가방 안에 아까 그 야구부가 준 편지가 있을까.

호열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까 그 고백 장면이 떠올랐고, 왜인지 강백호는 속이 매우 불편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자, 호열은 이마를 향해 뻗던 손을 내린다. 여전히, 호열의 눈동자 안에는 하트가 있는데. 왜인지 처음보다 작아진 듯하다.

왜, 작아졌을까.

정대만과 송태섭은 먼저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고, 지금 강백호와 양호열은 묘하게 대치 중이다. 아니, 강백호가 양호열을 불편해하는 게 느껴진다. 적어도 호열은 그것을 기민히 알아차렸다.

호열은 손을 뒤로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싸웠어?”

“아니! 넘어졌어!”

“넘어졌다고?”

 

뭔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 혹시 허리 때문일까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강백호의 말이 먼저 빨랐다.

 

“호열아. 오늘 같이 갈 수 있냐?”

“응? 오늘 아르바이트 있어. 그냥 인사만 하러 온 거야.”

“몇 시에 끝나?”

“10시.”

“그 사거리 백반집이지? 이따 데리러 갈게.”

“어? 왜?”

“할, 말이 있어.”

 

할 말. 그냥 지금 여기서 하면 안 될까? 궁금한데. 사람이 제일 열받는 게 말을 하다 마는 것이라 했는데 강백호는 아르바이트 끝날 때까지 양호열이 궁금하길 바라나보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백호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면서 호열에게 외쳤다.

 

“이따 봐!”

-

 

호열이 일하는 백반집은 사거리에 있는데, 이곳 사장님은 항상 호열의 냉장고에 반찬이 떨어질 때쯤 종이봉투에 새 반찬들을 통에 잔뜩 넣어 그의 손에 쥐어 주셨다. 늘 사장님은 장사 하다가 남는 반찬이라고 하셨지만, 누가 봐도 호열이 잘 먹는 반찬들로 새로 만든 것들이다. 가끔 백호를 가게로 데려와 밥을 사준 적이 있어서 사장님은 백호도 잘 알고 계신다. 백호는 정말로 싫어하는 것 없이 다 잘 먹는 터라 사장님이 특히 더 이뻐하시기도 하고. 이번에도 싸 주신 반찬들의 양을 보니 백호와 함께 먹으라고 통에 잔뜩 눌러 담아 주셨다. 호열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반찬이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가게를 나서는데 바로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언제 왔어?”

“방금.”

 

사장님 안녕히 계세요! 강백호는 문 너머로 보이는 사장님께 넉살 좋게 인사를 하며 양호열의 종이봉투를 건네받는다. 힐긋 종이봉투 안을 본 백호는 활짝 웃는다.

 

“우와! 장조림!”

“아, 전번에 네가 맛있다 하니 또 만들어 주셨나 보다.”

 

늦여름 밤의 골목길을 걸으며 강백호는 양호열을 힐긋 바라보았다. 함께 걸어갈 때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던 호열이 오늘은 조용하다. 아마, 아까 헤어지기 전 강백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오늘 네가 고백받는 걸 봤어. 절대 일부러 본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그 애랑 사귈 거야? 그 애가 키가 커서 좋아? 인상이 날카로운 게 맘에 들어? 내가 보기엔 순 양아치 같던데. 야구부라서 체격도 크니까 건강하다고 생각해? 야구부라고 건강한 거 아니다? 무릎이 아플 수도 있고 어깨 부상도 있을 수 있다고. 농구도 마찬가지지만. 그리고, 그리고. 왜, 하트가 줄어들었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잘 안되고 있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널 봐주질 않아? 그래서 혹시, 오늘 고백한 애랑 사귀려고 해?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모르잖아. 어쩌면 너랑 안 맞을지도 몰라. 호열이 넌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그 애는 그저 공 휘두르는 것만 좋아하고, 책은 싫어할지도 모르잖아. 옷에 관심이 많은 너랑 취향이 완전히 다를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낮에 고백받은 거 봤지?”

 

예상치 못한 호열의 말에 강백호는 고개를 돌렸다. 호열은 강백호를 바라보지 않는다. 골목길을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와 가로등 불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그의 옆모습만 보인다.

 

“사, 사귈 거야?”

 

급하게 나온 물음에 호열은 그저 엷게 미소를 지었다. 확답이 없다. 호열이는 지금 갈등하고 있구나. 하지만 분명 호열의 눈동자 속 하트는 그 야구부가 아니다. 야구부가 고백하기 전부터 하트는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호열은 고민하고 있다.

그러면 역시.

 

“그 남자애가 취향이야?”

 

역시 양호열은 말이 없다.

순간 강백호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말이 호열에게 상당히 상처가 되리라는 것도. 설령 호열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자신은 전혀 그것을 탓할 생각도, 놀릴 생각도 없었다. 그저, 놀랐을 뿐이다.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구나. 외길이라고 생각했던 길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뿐이다.

단지 그것일 뿐. 호열은 호열이니까.

양호열은 변하지 않으니까.

 

“왜? 더러워?”

 

하필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은 어둠만 있는 골목이어서, 호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강백호는 느껴졌다. 호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호열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강백호도 그의 보폭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발걸음 소리만 울리는 골목길에서 드디어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나갈 때.

강백호는 양호열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만.”

“놔.”

 

호열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난다. 그 속의 하트가 너무나 작게 쪼그라들었다.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이.

강백호는 고백에서 차였던 여자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부서진 하트를 떠올렸다. 왜인지 모르지만, 호열의 저 하트가 부서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더 강하게 호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니, 아니야.”

“뭐가.”

“호열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을 바라보는 호열의 얼굴이 낯설다. 늘 자신을 바라보던 호열의 눈빛은 다정했다.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던 눈매가 지금은 날카롭게 강백호를 노려보고 있다.

강백호 자신도 지금 왜 이러는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양호열의 이런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야. 그건 확실하다.

천재는 생각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자신의 이상형.

양호열의 이상형.

사랑.

눈동자 속의 하트.

핑크빛 기류.

강백호는.

양호열을.

 

“나 지금 키 커서 아마 190cm 될 거야.”

“…뭐?”

 

영문 모를 말에 양호열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것을 보니 양호열 진짜 화가 난 듯하다.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생각했나? 강백호는 황급히 양호열의 양 뺨을 잡았다.

 

“놓으라고 했지.”

“그리고! 그리고 내 인상 좀 사납지 않냐? 나도 너랑 같이 한때 양아치였는데. 사람들 나 무섭다고 피했잖아.”

“너 도대체 무슨.”

 

오, 미간 주름이 좀 펴졌다. 이 정도면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겠지.

강백호는 호열의 뺨을 잡았던 양손으로 제 양 허리를 집고 빙글빙글 돌린다. 지금은 이렇게 쉽게 해내는 동작이지만 한창 입원하고 있을 때는 절대 못 했던 동작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호열은 일단 이 기행을 한 강백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 허리 다 나았어.”

“…알아.”

“나 이제 건강해.”

 

양호열은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지 떨리는 까만 눈동자 속 하트는 여전히 작고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지만 아직 있다. 불씨처럼 위태롭지만, 아직 깨지진 않았어.

밤의 골목, 가로등 아래에서 강백호는 양호열의 손을 붙잡는다. 지금, 이대로 놓치면 왜인지 후회할 것 같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호열은 아까보단 약한 힘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강백호는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리고 강백호는 결국 남자에게 고백을 받은 호열을 보고 혼란스러움 속 떠오른 생각을 말해버린다.

 

“난, 어, 어때?”

-

호열은 화가 났고, 서러웠고, 당황했다.

어때, 라니.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한단 말인가. 호열은 자신의 손을 잡은 강백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왜 이제 와서? 이제야 이 마음을 접고 나도, 나를 봐주는 사람에게 가 볼까 했는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남 주기는 아깝고 자신이 가지긴 싫다는 건가. 그건, 너무.

호열의 미간이 다시 구겨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일부러 모른척하는 호열을 보고도 강백호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정리하듯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음, 음 말을 고르다가 하나씩 정리된 말들을 뱉어낸다.

 

“나는, 너를 정말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 어떤 때는 가족 같아.”

 

그건 맞다. 양호열은 강백호의 둘도 없는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다. 호열이 원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기도 하다. 사랑은 불안전하니까, 깨질 수 있으니까, 호열은 누구보다도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오랫동안 강백호의 옆에 남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한 번도 너의 손을 잡고 싶다던가, 안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거든?”

 

그렇겠지. 그런 건 남자와 여자가 사귀면 해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깊게 박혀있는 강백호이었으니.

호열은 강백호가 생각하느라 잡힌 손의 힘이 느슨해지자 다시 손을 빼내려 했지만, 곧바로 더 강한 힘이 호열의 손을 꽉 붙잡는다. 말이 아직 안 끝났나 싶어 강백호를 올려보니 그는 호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전에 내 앞에서 울었을 때.”

“…어.”

 

부끄러운 기억이다. 퇴원한다는 백호의 말에 머릿속에서 그동안 고생했던 병원 생활들이 지나가고 드디어, 라는 생각과 함께 웃음과 눈물이 났었다. 겨우 이정도 부상으로 네 영광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홀로 앓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내 주려 얼마나 수많은 밤 지새며 너의 등을 쓸어내렸던가. 남몰래 눈물 흘리고, 다음날 부은 눈으로 재활 받으러 가는 그 모습, 오늘은 통증이 좀 줄어든 것 같다며 짓던 미소.

그저, 기억들이 났을 뿐이다.

그랬을 뿐. 너에겐 그저 사소했던 순간일 텐데.

 

“그게 왜.”

“그때 네가 울 때, 기분이 이상했어.”

 

가로등 아래 보이는 강백호의 얼굴은 왜인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호열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다.

꾹꾹 눌러쓴 편지를 건넬 때의 그 수줍은 얼굴.

 

“나 때문에 웃고, 우는 너를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어. 나도 같이 웃고 싶었고, 울고 싶었어. 그때는 왜 그런지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아.”

 

강백호는 다시 호열의 양 뺨을 잡았다. 눈동자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 옆에 있는 네가 싫어.”

“그게….”

“네가 나만 바라봐줬으면 좋겠어.”

“…왜?”

 

강백호의 눈동자가 호열의 눈동자를 비춘다.

아마도. 내가.

 

“내가, 널 좋아하나 봐.”

 

갑작스러운 고백에 호열은 그저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본다. 분명히 강백호가 하는 말을 들었지만, 머리가 해석하지 못한다. 강백호가? 양호열을? 좋아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단어들이 머릿속을 부유해서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손바닥에 닿은 면이 쿵쿵 울리고 있다. 어느새 강백호가 호열의 손목을 잡아 자기 가슴으로 끌어왔는데 옷 너머인데도 불구하고 심장이 빠르게 울리고 있다. 마치 100m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여전히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발갛게 익어있고, 떨리는 눈동자는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호열아.”

“……왜.”

“나 심장 터질 거 같다.”

 

너는? 강백호는 자신의 다른 손을 호열의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맞닿은 손에 느껴지는 호열의 심장도 빠르게 울리고 있다. 평소에는 서늘한 편이었던 호열의 체온도 어느새 강백호와 맞먹을 정도로 뜨겁다. 환히 드러난 이마가 발갛게 물들 정도로.

그래서 양호열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강백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 감춰놨던 여린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나 아직 대답 안 했어.”

 

호열의 불퉁한 말에도 강백호는 그를 껴안는다. 호열은 그 품속에서 불만스럽게 조금 몸을 비틀었지만, 이내 얌전히 안겨있다.

 

“응, 대답 기다릴게.”

“…….”

 

잠깐 힘을 줘 호열을 꽉 껴안곤 바로 맞붙었던 몸이 떨어진다.

뜨겁고, 땀이 나서 끈적이는 이 여름의 끝밤에.

호열은 조금 울고 싶었다.

겨우 가라앉은 자신의 마음이 다시 엉망으로 흔들린다. 이제 겨우,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을 분리했는데. 영원히 사랑을 가라앉게 하려 했는데. 지금은 어떤 것이 우정이고 사랑인지 엉망으로 섞여버려서, 주책없이 심장은 뛰고 얼굴은 뜨겁다.

 

“…….”

 

호열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백호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눈동자에 비친 자신이 보인다.

그의 눈동자 안에 사랑이, 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