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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뮤 롱디.jpg

​토마토 대소동

​AKMU - 롱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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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벼락치기에 열을 올리는 시험 기간도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발등에 붙은 불씨가 피어오른 듯 전력으로 밀린 공부를 해치우는 이들의 열기로 후끈해진 개방형 스터디 라운지는 오후 1시가 넘어가자 금세 한적해졌다. 여기 붉은 머리의 남자만이 자리에 남아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미동 없이 앉아 있다. 식사할 곳을 정하지 못한 채 주변에서 두런거리던 이들은 사나운 불곰처럼 험상궂은 그의 표정에 겁을 먹은 듯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조그마한 노란 연필 아래 쭈욱 내민 입술이 앙증맞게 여겨질 만큼 커다란 덩치를 가진 그는 한참 전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조그마한 휴대폰 화면만 노려보고 있었다. 새까맣고 작은 글자들이 말풍선 위에 동동 떠오르며 반짝이는 두 눈 속에 타투처럼 새겨진다.

 

[오늘은?]

[안 돼.]

 

[오늘은~?]

[안 돼~]

 

[오늘은ㅠㅠ?]

[안 돼ㅠㅠ]

 

며칠째 반복되는 ‘천재남친호열이♡’와의 대화 패턴은 장마철 산책을 나가기를 바라는 강아지와 야외 활동은 절대 안 된다고 그를 말리는 반려의 인상을 주었다.

미국에서 지냈을 때에도 호열과 이 정도로 멀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는 호열이 언제 어디서든 제 전화에 화답해주었단 말이다. 어, 백호야. 마침 너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냐? 밝게 웃으며 제게 일상 이야기를 조각조각 건네주던 호열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애달픈 그리움이 몸집을 부풀려 제 몸을 꾸욱 짓누르는 것 같았다.

으으, 양호열.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흐르지 못하게 또 활짝 웃으니 짜리몽땅한 연필이 그의 입술에서 벗어나 책상 위를 데구르르 굴러간다. 기어이 책상의 둥근 경계를 넘어 바닥으로 낙하했는지 허공에 짜그랑 소리가 울렸다. 금속이 대리석과 부딪치며 내는 작은 소리마저 거슬려 그는 책상 위에 풀썩 엎드려 버렸다.

 

***

 

“백호야, 나 한번 열심히 공부해 보려고.”

“오우, 멋진데! 호열이 너도 드디어 마음을 먹은 거냐?”

“응, 그러니까 우리….”

“엉? 왜 말을 하다 말아?”

“우리 잠깐 시간을 가지자. 시험 기간에만 말이야.”

 

뭐? 백호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바람에 그가 흡입하다 만 110% 당도의 초콜릿라떼가 턱에 연갈색 길을 내며 줄줄 흘러내렸다. 호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검지로 달콤한 음료의 잔상을 살살 닦아냈다.

미안, 백호야. 내 체면 좀 지켜주라. 천재는 기다리는 것도 천재니까 잘할 수 있지? 어, 엉, 당연하지…! 시험 끝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거냐? 그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지! 고마워, 천재. 호열이 까치발을 들어 상처럼 내려준 볼뽀뽀에 헤벌쭉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하던 그와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천재는 무슨. 좋다고 웃고 있지만 말고 호열이를 붙잡았어야지. 억지를 부려서라도 말렸어야지, 이 바보…! 커다란 두 손바닥에 거칠게 쓸리고 이내 파묻힌 백호의 낯이 일그러진다.

우웅. 정적 속 휴대폰 진동 소리가 자리에 쓰러져 있던 그를 일으켰다. 우웅…. 그 소리를 따라하듯 입을 우물거리며 그는 굽혔던 몸을 바로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천재남친호열이♡

[백호야]

[전화할래?] 오후 1:10

 

우와악! 화면 상단에 나타난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한 백호가 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덜덜 떨리는 검지손가락으로 외운 지 오래인 열한 자리의 숫자를 꾹꾹 누르고는 왼쪽 하단의 초록색 수화기 버튼을 톡 터치한다. 큼큼. 멋진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목을 가다듬고 있으니 전화 연결음이 한 번 지나가고 여느 때처럼 나긋한 호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백호야.

 

-바로 전화했네.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

-크흠, 뭐… 딱히? 천재가 그렇게 한가할 것 같으냐?

-메시지 적는 중 아니었어? 이 시간이면 나한테 문자 남기던데.

-아, 아, 아니거든! 무슨 소리냐, 양호열! 진짜 아니거든!

-푸핫! 그래그래. 오랜만에 천재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호열아, 있잖냐.

-응.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너 하나만 골라봐라. 나야, 시험이야?

-푸하핫! 아, 강백호 오늘 왜 이렇게 귀엽지?

-시끄럿! 빨리 고르기나 해. 나냐, 시험이냐?

-당연히 강백호지.

-그, 그러는 녀석이 지금….

-그러는 녀석이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아냐.

 

강백호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어? 아니…. 나도 다 때려치우고 싶다, 백호야. 너를 사랑해서 지금 이 난리를 피우는 건데. 지난번에 얘기했을 때 너도 기다려주기로 약속했잖아. 응? 천재야. 끙…. 호열의 말은 토씨 하나 틀린 게 없었다. 반박하기 어려운 그의 날카로운 문장 하나하나를 물리적으로 피하고 싶기라도 한 듯 널따란 어깨가 점점 안으로 굽어 물에 홀딱 젖어버린 종이처럼 쪼그라들었다.

호열은 백호의 곁을 지키기 위해 당당해지고 싶다고 했다. 백호가 반짝이며 빛을 내는 만큼, 그의 빛을 가까이서 지켜볼 뿐만 아니라 그의 빛을 직접 지켜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산왕전 이후 백호의 재활을 도우면서부터 호열에게 꿈이 생긴 것이다. 그는 물리치료사가 되어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백호를 바라보고, 그의 플레이를 열성껏 응원하고, 그가 부상을 입거나 몸에 자잘한 상처가 생길 때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가 그의 아픈 곳을 치료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천재,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있지? 웅…. 호열아, 이제 며칠 남았다고? 나흘. 알았어…. 오늘도 호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천재의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아이스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식사를 마친 학생들로 바글바글한 교내 카페에서 백호는 호열과 함께 앉았던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매장용 컵에 담긴 아아를 꼬나보고 있다. 죄 없는 음료는 그 원망 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컵의 겉면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백호가 시즌별 과일 음료를 시킬 때마다 호열은 언제나 단 한 가지 메뉴만을, 하얀 계절이 뼛속까지 시린 추위를 몰고 와도 변함없이 아이스아메리카노만을 시키곤 했다. 그런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있었는데, 얼주가였던가. 백호는 이걸 마시면 사랑하는 호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3초 간의 진지한 고민 끝에 생애 첫 아아를 마셔보기로 결심을 내리고는 곧장 컵을 제 쪽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동그랗게 모은 두 입술 사이에 빨대를 넣고 쪼옥 한 입을 들이키는 데까지는 어려울 게 없었다.

콜록, 케헥, 큭, 커헉! 산미와 고미의 쓰라린 향연이 그의 오감을 강타했다. 카라멜마끼야또, 카페모카가 커피의 최소 당도로 기능했던 백호에게 아메리카노는 써도 너무 쓴 종류의 커피였다. 그 사이에 눈물샘마저 자극당했는지 이제는 시야마저 흐려질 지경이었다. 양호열은 대체 이 사약 같은 걸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거지. 잠을 못 자서 피곤하면 여기에 샷 추가까지 한다고 했지, 진짜 지독한 놈.

눈을 질끈 감은 채 굳어 있으니 옆에서 키득거리는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하핫, 그러게 쓴 건 입에 대지도 못하는 놈이 이걸 왜 마셔. 바보냐?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양호열. 이리 줘. 그럴 줄 알고 내가 다른 거 시켜왔다. 자연스레 제 아아를 가져가고 다디단 딸기스무디를 건네주는 양호열. 전부 제 상상 속 가짜 양호열이었다. 저리 가! 손을 휘휘 젓자 호열의 실루엣들은 그를 비웃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넓고 둥근 창문 너머로 시선을 두자 벚꽃비가 흩날리는 아름다운 풍경과 그 안에서 따사로운 봄볕을 쬐며 길을 걷는 연인들이 보인다. 작년 이맘때에는 2인용 자전거를 빌려 뒷자리에 호열이를 태우고 벚꽃 구경도 다녔는데. 호열아, 어떠냐? 백호 너밖에 안 보인다. 우하핫, 넌 천재가 그렇게 좋냐! 아니, 진짜로 네 등판밖에 안 보여….

당시 호열이 강의 시간표를 모조리 교양 과목으로 채운, 대학의 낭만을 만끽할 자격이 주어진 새내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 몰래 손을 잡은 채 캠퍼스 이곳저곳을 누비고, 고요한 밤 연인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분수대 앞에서 하늘 위에 수놓인 별을 구경하며 입을 맞추었다. 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기억들을 반추하자 입가 위로 하얀 구름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난다.

가장 기분이 좋았던 순간을 꼽으라면 역시 교내 농구 경기와 호열이 듣는 필수 교양의 시간이 겹친 날, 자체 휴강을 때린 호열이 경기의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를 힘껏 응원해주었을 때다. 새하얀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간 붉은 딸기 조각들처럼 참 달콤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는데…. 눈을 감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백호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야, 그 정도면 그냥 쫑내자는 거 아니냐?”

“그래. 헤어져라, 헤어져!”

“너네도 진짜 그렇게 생각해…?”

“응, 롱디도 아니고 그게 뭐냐?”

“롱디도 이것보단 나을걸. 이참에 걍 끝내라.”

“하… 그래야겠다. 다들 고민 들어줘서 고마워.”

 

옆 테이블의 연애 상담을 곁다리로 들어보니 애인이 시간을 갖자는 말을 건넨 이후로 오래도록 연락을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인 사이에서는 잠깐 시간을 갖자는 말이 이별까지 이어질 수도 있구나. 백호는 잠수 이별의 메커니즘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호열을 의심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양호열이 강백호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호열보다도 백호 자신이 더 잘 알았으니까.

다만 롱디라는 단어가 화살처럼 날아와 무미한 평화를 그리던 그의 마음속에 콕 하고 꽂혀버린 것이다. 한쪽이 다른 나라에 있는 것도,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는 것도 아닌데 호열과 연락이 두절된 이 상황을 롱디가 아니면 대체 무슨 말로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와그작. 백호는 입가심을 위해 물고 있던 아아의 얼음을 어금니로 깨부수며 생각했다. 호열이 만들어둔 이 롱디라는 얼음을 제 손으로 집어내어 와그작 부숴버리고야 말겠다고.

 

***

 

 

 

오늘이다. 오늘이야말로 결전의 날이다. 백호는 중요한 경기를 앞두기라도 한 듯 벌렁거리는 심장과 날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열이 작년 생일선물로 사준 네이비색 코트를 부적처럼 걸치고 비장한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호열이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백호는 캠퍼스맵과 호열의 시간표를 번갈아 보며 강의실을 향해 부리나케 걸음했다. 임상운동학, 백호열 교수님, 우리결혼할관 310호. 뭐야, 강의실 이름이 왜 이래? 강의실 입구 옆에 빈 의자가 놓여 있길래 그쪽에 앉았더니 사람들이 하나둘 제 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 강백호 선수 아니에요? 맞는데요. 대박! 완전 팬이에요. 저 오늘 시험 보는데 기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 아, 예. 힘내십쇼. 파이팅! 감사합니다. 헉, 저도 응원해주세요. 파이팅하십쇼! 저도요. 저두요! 저도용…. 저를 향해 모여드는 인파에 백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게 아닌데…. 나는 팬미팅 하러 온 게 아니라 호열이를 만나러 온 건데.

결국 호열의 모습을 코빼기도 보지 못한 채 시험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저 강의실 안에 호열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호열은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 밖으로 나올 것이다. 2주 동안 꽁꽁 숨겨두었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반드시, 두 번 다시 그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 강백호는 농구천재, 리바운드의 제왕이니까!

이번에는 맞은편 벽면에 기대어 앞문과 뒷문 사이를 넓게 지켜보았다. 시험을 마친 이들이 하나둘 좀비 같은 스텝을 밟으며 강의실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탐스러운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스캔하던 백호는 금세 맥이 빠졌다. 양호열 왜 이렇게 안 나와? 얘 시험 토낀 거 아냐? 아님 벌써 다 보고 갔나? 이상하다…. 내가 놓쳤을 리가 없는데.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뻐근한 목의 관절을 풀던 그 순간, 백호는 발견했다.

짤랑 소리를 내며 제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토마토 키링을. 인형 뽑기에 한창 열과 성을 다하던 시절, 호열과 뽑기방에서 조그마한 토마토 키링과 두부 키링을 뽑은 적이 있었다. 이 두부 너 닮았으니까 내가 가질래. 참나, 그럼 나는 토마토 줘. 이건 너 닮았으니까. 엑, 그게 날 닮았다고? 하하호호 웃으며 그와 커플 키링을 하나씩 나누어 가진 그날 이후로 호열의 검은 가방에는 늘 새빨간 토마토 키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양호열!”

 

비척거리며 강의실 밖을 향하던 작은 등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그러고는 언제 멈추었냐는 듯 곧장 빠른 속도로 걸어간다. 저 자식이! 백호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가방을 움켜쥐었다. 켁! 어정쩡한 각도를 그리며 호열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강백호, 이거 놔라. 문장을 나직이 읊조리는 목소리에서 잔잔한 분노가 느껴졌다. 어, 어떡하지. 호열이 화났나. 가방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호는 호열의 몸을 제 쪽으로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마주한 건, 생전 처음 보는 호열의 모습이었다. 낡고 헤진 회색 후드티 한가운데에 무슨 대빵 커다란 토마토가… 바보 같은 토마토 캐릭터 하나가 네모난 선글라스를 쓰고 헤실헤실 웃고 있다. 캐릭터 뒤로는 검고 굵은 글씨로 영어 문장 하나가. I will be a ketchup. 나는야 케첩 될 거야? 시선을 내리자 상의만큼 펑퍼짐한, 검은 체크무늬가 새겨진 추리닝 바지와 밑창이 떨어지기 일보 직전으로 너덜너덜해진 삼선 슬리퍼가 보인다.

너어는, 진짜…. 저를 탓하는 조그마한 목소리에 시선을 다시 위로 올리면 검은 캡모자와 뿔테 안경을 걸친 호열의 얼굴이 있었다. 며칠간 햇빛을 받지 못한 듯 창백한 얼굴 위에는 안경알 너머로 유독 자그맣게 보이는 두 눈과 부끄러운 듯 붉게 물든 양볼, 생기 없이 마른 입술이 있다. 양호열이, 그 간죽간살 양호열이… 이렇게까지 엉망이 될 수 있다고? 처음 보는 연인의 모습이 신기해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호열이 그를 타박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강백호….”

“호, 호열아.”

“응.”

 

호열의 두 눈이 저를 향한다. 호열의 눈은 평소와 다름없이 저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양호열이 제게 눈을 맞추고 있다. 그제야 강백호의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호열을 다시 만나면, 문자 말고 통화 말고,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다시 만나면 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백호는 보란 듯이 양팔을 넓게 벌리고 환히 웃는다.

 

“보고 싶었어.”

 

호열이 제게 잰걸음으로 다가와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안긴다. 허리를 감싸오던 왼쪽 손이 예고 없이 주먹을 쥐어 옆구리를 세게 때린다. 악! 강백호 미워 죽겠어. 진짜? …나도 보고 싶었어. 얼마 만에 나누는 포옹인지, 백호는 호열이 곁에 부재한 시간을 계산하려다 그만두었다. 그와 마주보고 온기를 나누는 이 순간이 넘치도록 좋았으니까. 크흥,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던 호열이 한순간 몸에 힘을 풀고 고꾸라지려 했다. 반사적으로 그의 몸을 받쳐 든 백호가 그를 살폈다. 호열이 많이 피곤했나. 잠들었네….

호열을 등에 업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백호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포근한 이불을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안경을 조심히 벗겨주고 고운 이마에 몰래 입을 맞추자 가슴 한쪽이 몹시도 간지러웠다. 잠자는 숲속의 양호열, 큭큭. 나직한 웃음소리를 내자 그의 왕자님이 꾸물거리며 두 손을 뻗는다. 갈 곳 잃은 손이 더듬더듬 자리를 찾더니 방금 전처럼 그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하여튼 양호열, 이 천재를 너무 좋아한다니깐. 백호는 연인의 뻣뻣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오롯한 승리의 순간을 누렸다.

호열은 그렇게 반나절을 잠으로 보내고 느지막한 시간에 눈을 떴다.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내내 그리던 체향과 너른 품을 느꼈다. 으음, 백호야…. 일어났냐, 양호열. 위에서 들려오는 장난스러운 말씨에 호열이 눈을 부릅뜨고는 고개를 들었다. 강백호, 너!

 

“왜 약속 어겼어!”

“보고 싶었다니깐.”

“그래도, 이렇게 말도 없이 찾아오면 어떡해. 시험 끝나면 내가 연락하겠다고 했잖아.”

“놀랐냐? 미안. 근데 난 진짜 이해가 안 된다, 호열아.”

“왜 이해가 안 돼. 연인이니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연인이니까 바보 같은 모습도 보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어쭈, 강백호… 나는 너한테 그런 모습 보여주기 싫다고.”

“그런 게 어딨어! 너도 내가 바보같이 침 흘리면서 자는 거, 밥 먹으면서 얘기하다가 밥풀 튀기는 거, 다 봤잖아!”

“너는… 너는 귀여우니까 괜찮아.”

 

너도 귀여워, 인마-! 컥, 백호야, 숨막혀…. 백호가 팔에 힘을 주고 그를 끌어안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호열이 서둘러 탭을 쳤다. 다급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이마에 따뜻하고 축축한 입술 도장이 다시금 새겨졌다. 백호는 악동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제부터 알아두라구. 나도 엉망진창 양호열 다 볼 거야.”

“넌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네 꼴이 뭐? 귀엽기만 하구만.”

“허….”

“양호열은 다 내꺼야! 잘난 양호열도 못난 양호열도 다 내꺼라구. 이제부턴 숨기지 말고 다 보여줘야 된다. 알았냐?”

“…그래, 알았다.”

 

호열이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그를 마주 안았다. 마음만큼 굶주렸던 두 사람의 뱃속에서 나란히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호열이 너두 배고프냐. 조금. 쫌만 기다려. 오늘은 천재표 김치볶음밥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장한 표정과 몸짓으로 스트레칭을 하는 백호를 보며 호열이 웃었다. 강백호, 도저히 너를 이길 수가 없네. 문으로 향하던 백호는 어깨를 뒤로 젖히고 웃더니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우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하지. 나는 천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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