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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cheeks - Eldon.jpg

내꺼? 내꺼!

호지

@hoji_ww

eldon - Pink cheeks

※ 등장인물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는 모브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거울 앞에 선 남자가 소리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한 손에는 진회색 니트 가디건을, 다른 손에는 연갈색 체스터필드 코트를 들고 하얀 셔츠 위에 번갈아 대보고는 코트를 걸치기로 결정한다. 문득 거울 너머로 마주친 뚱한 얼굴에 여지없이 웃음이 번진다.

평소라면 일찍 준비를 마친 백호가 그를 보며 히죽거렸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잔뜩 심통이 난 입술이 호열에게 가닿을 듯 앞으로 주우욱 늘어진다. 호열의 코디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션이 멋스럽지 않냐고?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호열은 자기 자신을 꾸밀 줄 아는 남자니까. 그런 그가 이렇게 멋을 부리고서, 이 천재가 아니라 생판 모르는 남을 만나러 간다는 게 문제다!

아랫입술을 짓씹던 백호가 끝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꾸미고 가는데?”

“경민이 처음 만나는 자리잖아.”

“경민이? 경민이???”

“응, 이번에 밑으로 들어온 후배.”

 

벌써 말을 놨어? 아직 만나지도 않았잖냐. 요샌 다 그렇게 한다, 백호야. 말도 안 돼…. 호열은 방금 제 세상이 무너진 듯 허공을 바라보는 백호의 볼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저를 보게 했다. 어때? 이 정도면 괜찮겠지?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걸 남친한테 물어보는 게 말이 되냐고오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연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호열은 콧노래를 부르며 왼손목에 시계를 찼다. 후배 하나 들어온 게 뭐라고, 무척이나 신이 난 것 같았다.

 

“호열아… 암만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응?”

 

단호한 표정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린다.

 

“너무 꾸몄잖냐. 소, 소개팅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왜 그래, 유치하게.”

 

이크. 말실수를 인지한 호열의 입이 빠르게 닫히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냈다. 유치하게…? 너 지금 나보고 유치하다고 했냐?! 백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게 아니라… 질투할 필요 없는 거 알잖아, 백호야. 그냥 내 후배인데. 그 말에 왜인지 낯빛이 더 어두워진다.

말없이 호열을 뾰로통한 얼굴로 흘겨보던 그는 씩씩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호열은 내심 안도했다. 저 정도면 스크램블 에그 위에 빨간 하트 하나 그려주는 걸로 넘어갈 수 있을 거다. 귀여운 놈. 닫힌 방문을 보고 빙글거리는 웃음을 짓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다녀올게, 백호야! 밥 챙겨 먹는 거 잊지 말고.”

 

옷매무새를 마저 가다듬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선다.

 

-

 

 

 

분명 그렇게 끝날 일이라 믿었는데.

경민과 마주 앉아 메뉴를 고르던 호열의 입이 벌어진다.

강백호… 네가 왜 여기 있어?

 

-

 

 

 

그렇게 호열이 떠난 집에 백호는 홀로 남았다. 얼굴도 안 보여주고 가냐, 매정한 자식. 닫힌 문은 언제든 열고 들어오라고 있는 건데. 아니, 제 생각을 귀신같이 읽곤 하는 그라면 방 안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바지 끄댕이를 붙잡으려는 까만 속셈을 진작에 다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언젠가의 호열처럼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손에 잡힐 듯 느리게 떠가면서도 잡히지 않는 구름 더미가 시야에 가득 찬다. 유유히 흘러가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호열이 떠올랐다. 새하얀 구름 위로 호열의 얼굴을 그려본다. 그리울 정도로 보고 싶은 그 얼굴을.

역시 호열이 보고 싶다.

호열의 볼이 보고 싶다. 토막 상식이라기엔 천재만 알고 싶은 사실 하나. 평소에 쑥 들어가 있는 호열의 볼은 밥을 먹을 때 오동통하게 동그래진다. 아침에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얼굴이 조금 부었을 때도 귀엽지만, 역시 밥을 먹는 호열이 제일 귀엽다. 동그란 두 볼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걸 바라보다 진지한 얼굴로 이제부터 나랑 있을 때만 밥 먹으라고 억지를 부리면 말이 되는 소릴 하라며 어깨를 찰싹 때렸었는데. 흐흐, 그렇게 당황한 얼굴도 제법 귀여웠지.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말이냐면, 호열이 보고 싶다는 뜻이다.

보고 싶고, 보고 싶고, 보고 싶다. 무진장 보고 싶다!

호열이랑 같이 밥 먹고 싶은데…. 지금쯤 다른 놈이랑 하하호호 웃으며 식사하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난다. 날 혼자 두고 밥이 넘어가냐, 양호열? 씨, 짜증나. 나는 너 없으면 밥 같은 건 생각도… 안 나는… 꼬르륵. 배꼽시계는 주인과 다르게 언제나 정직했다.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한다. 호열이도 챙겨 먹으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혼밥하러 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는 호열의 생각뿐이었다. 발을 질질 끌며 대학가의 식당으로 향한다. 그런데… 간절히 바라고 바라면 그 일이 꼭 이루어진다고 누가 그랬던가.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호열과 따악 눈이 마주쳤다.

호열이 한쪽 눈썹을 올리더니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낸다. 천재는 억울했다. 호열이 오늘 어디서 뭘 먹을 거라고 귀띔해준 적 없고, 맹세코 그의 뒤를 졸졸 쫓아간 적도 없다(사실 그러고 싶었는데 돌아올 호열의 냉랭한 반응을 생각해서 겨우 참았다). 그저 호열이 보고 싶어 호열을 생각하며 호열과 공강 시간에 자주 찾던 가성비 좋은 퓨전 짬뽕집에 왔을 뿐인데. 천재의 직감이 좋았던 건지 운이 좋았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이건 정말로 우연이었다. 입구에 멈춰 선 채로 억울한 얼굴과 몸짓 발짓을 다 하고 있었더니 호열이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뭐가 먹고 싶다고 했지?

다정한 물음을 받는 이의 뒷모습을 살피는 건 어쩌면 남친으로서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침 그들의 주변 테이블이 비어 있길래 냉큼 가서 자리를 잡았다. 경민이라는 놈이 누군지 보자. 머리는 호열처럼 흑발에 깔끔하게 올린 것 같고, 호열의 것과 비슷한 진회색 코트가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다. 잘 차려입었네. 붉은 호랑이가 그려진 검은 후드티 한 장만 걸치고 나온 제 모습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담백하고, 말투도 차분하고. 신입생답지 않게 여유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낯선 환경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갖가지 소란을 피우던 제 새내기 시절이 떠올라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경민은 호열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깔끔하고, 세련되고, 나는 알지도 못하는 멋을 잘 아는. 요즘 그걸 뭐라고 하더라. 쭈꾸미, 아니 추구미가 비슷한 사람. 그러고 보니 얘도 운동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몸도 좋으려나. 아니, 몸은 안 봐도 이 천재가 더 좋을 거거든! 구질구질한 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세차게 젓는 순간,

 

“호열아.”

 

낯선 목소리로 불리는 아주 익숙한 이름을 들었다.

미친,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뒷말은 뒤늦은 사랑과 후회를 토로하는 어느 유행가의 노랫말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호열이 그에게 언짢은 표정을 짓거나 뭐라고 한마디 던질 줄 알았는데, 활짝 웃는다. 손사래를 치고 양손을 써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한다. 저 녀석이 뭐라고 했길래 호열이가 저렇게 웃는 거지.

백호의 눈이 좁혀졌다. 너네 굉장히 즐거워 보인다? 여태껏 외면하고 있던 질투심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락모락 김이 나고 와우 섹시 푸드 소리가 절로 나오는 크림 짬뽕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코로 들어가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식사를 급히 해치우고 팔짱을 낀 채 백호는 잘난 후배놈의 뒤통수를 꼬나봤다. 빈 테이블을 정리하러 온 직원이 난감한 얼굴로 두 테이블을 번갈아 쳐다봤다.

경민아, 잠시만. 호열이 제 쪽을 힐끔 보더니 핸드폰을 토독토독 두드린다.

식탁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려 설레는 마음으로 메시지창을 확인해보니,

 

[강백호]

[그만하고 집에 가라]

 

열한 글자로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말이 와 있었다.

 

이따금 호열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던 불쌍한 표정을 지어봤지만 호열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별수 없이 의자를 끌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두고 보자, 경민이 자식. 네가 이 천재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냐? 어림도 없지.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밖을 나섰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후배를 달래며 호열은 직감했다. 이거 스크램블 같은 걸로는 수습이 안 되겠구나….

 

-

 

인간은 본디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더욱 시기하고 질투하는 법이다. 전의를 상실한 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동안 백호는 아주 슬픈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강백호는 양호열의 후배가 될 수 없다.

모르는 걸 물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호열의 후배가 될 수 없다.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재수해서 우리랑 동갑이라니(호열이 카톡으로 알려줬다.) 더욱 짜증이 났다. 저 자리는 내 거여야 했는데. 양호열은 내 건데. 한편으로는 경민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왜 나는 양호열처럼 친절하고 젠틀하게 학교 생활을 알려주는 선배가 없는 거지. 작년에 백호를 전담 마크하며 이것저것 새빠지게 알려준 킹콩 선배가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사랑을 하고 있어도 상사병이 올 수 있는 걸까. 답지 않게 시름시름 앓으며 백호는 소파에 몸을 구기고 눕는다. TV의 전원을 켰다가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얼굴들이 보기 싫어 도로 꺼버렸다. 역시 호열이 없으면 아무것도 재미가 없다. 호열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눈을 감고 아까부터 주구장창 떠올리던 생각을 이어간다.

양호열이 보고 싶어.

 

-

 

“백호야, 나 왔어.”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호열은 멋쩍은 얼굴로 목덜미를 문지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매번 현관까지 튀어나와 반겨주던 백호가 있었는데. 불이 켜지지 않은 거실 쪽으로 걸어가면 그제서야 소파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허공에서 꿈질거리는 두 발과 푹신한 등받이에 파묻은 얼굴. 나 삐졌어요- 한마디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백호야. 호열이 작게 속삭이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린다. 아, 강백호 연기 진짜 못해. 호열이 소리 없이 웃었다.

집에 오는 길 내내 그리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백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호열도 평소보다 지쳐 있었다. 처음 보는 이와 서로의 MBTI를 맞혀보는 걸로 시작하는 호구조사, 학교와 전공 설명을 빙자한 썰 풀이, 꿀강 추천과 피해야 할 교수님 리스트 공유를 하는 시간으로 장장 두 시간 반을 채우고 돌아왔다. 그럴 듯한 선배 노릇을 한다는 건, 사회생활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지긋지긋한 면이 있었다. 그나마 경민이 저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라 대화하며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밖을 나섰을 때부터 착실하게 그 크기를 키워갔다. 오히려 식당에 들어선 백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숨통이 트였다고 해야 할까. 사랑과 질투의 바보짓으로 제 긴장을 풀어준 그에게 고마웠다.

이걸 속아줘, 말아. 평온한 낯을 꾸미려 애쓰는 얼굴을 내려다보다 동그란 볼을 꾹꾹 눌러 그를 깨웠다. 귀여운 장난을 받아주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너 안 자는 거 다 알아.”

“…어떻게 알았냐.”

 

바보. 속일 사람을 속여라. 놀리는 말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본다. 자세히 보니 눈시울이 붉은 것도 같다. 운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마음처럼 삐죽 솟아 있는 머리칼을 부드러이 쓰다듬으면 미간에 잡힌 주름이 조금씩 풀어졌다.

 

“왜 그렇게 심통이 났어?”

“…….”

“속상해? 내가 다른 사람 만난 게?”

“그냥 만난 거 아니잖아.”

 

웃으면서 얘기하고, 귀엽다는 듯이 봐주고, 이것저것 착한 목소리로 알려주고… 네가 막, 나한테 맨날 해주는 것처럼, 걔한테 자꾸 이렇게 저렇게…. 불안을 닮은 불만을 줄줄이 소세지처럼 늘어놓는다.

 

“그래서 서운했어?”

 

세모꼴을 그리던 백호의 눈이 잠시 동그래진다. 다정한 말씨였지만 역시 호열은 저를 놀리는 게 분명했다.

 

“몰라. 양호열 미워.”

“왜 미워? 미워하지 마.”

“씨… 네가 자꾸 사람들을 홀리고 다니니깐.”

“애인 있다고 말했어. 그리고 걔도 좋아하는 사람 있대.”

“걔가 너 잘생겼다고 하는 거 다 들었어.”

“그건 그냥 해주는 말이지.”

“아니거든! 양호열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아, 말려들었다. 호열이 피실피실 웃으며 얼굴을 들이민다.

 

“나 잘생겼어?”

“…그걸 몰라서 묻냐?”

“아니, 나 정도면 평범한 거 아닌가?”

“아오, 짜증나게 하지 마라.”

 

근데 백호야, 내가 잘생기면 너한테 좋은 거 아니냐? 이 자식이 진짜. 으하하! 머리를 꿍 박아도 호열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얄미운 자식…. 속이 다시금 부글부글 끓는다.

 

“그리고 너어, 나보고 꺼지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집에 가라고 했지.”

“그거나 그거나. 어떻게 나한테 그래?”

“후배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은데 어떡하냐, 그럼.”

“쒸이….”

“웃겨, 작년에 선배 만나러 갔을 땐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땐 안경 선배였잖아!”

“그거나 그거나.”

“달라! 완전 다르다고!”

 

입술이 댓발 튀어나온 걸 보니 곧 있으면 잘 익은 토마토가 폭발해버릴지도 몰랐다. 호열에게 토라진 연인을 놀리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젠 정말로 수습에 나설 차례였다.

호열이 소파 등받이와 백호 사이의 좁은 틈으로 몸을 구기고 들어갔다. 백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입을 달싹인다. 속으로 되뇌며 연습한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한숨을 쉬자 백호의 미간에 다시금 깊은 주름이 진다. 움푹 파인 곳에 손을 대고 느릿하게 문지르며,

 

“대체 뭐가 문제야, 백호야.”

“…….”

“나는 네 거잖아.”

 

말을 마친 호열이 쿵쿵거리는 가슴 한가운데에 얼굴을 파묻는다. 미치겠다, 진짜. 사람들은 이런 말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냐.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넋을 놓고 있던 백호의 정신이 돌아왔다. 앞에 놓인 어깨를 덥석 붙잡고 세상에서 제일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한다.

 

“호열아… 한 번만 더 말해주라.”

“못해.”

“아아, 한 번 마안.”

“싫어!”

“제발 딱 한 번만, 응? 양호열이 누구 거라고?”

“…강백호.”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입술이 겹쳐진다. 넘어오는 숨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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