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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낡은 괴담.jpg

우리는 지금 해 아래에 있어요

정우 - 낡은 괴담

※트리거 요소※

가정폭력, 아동학대, 유혈

 

 

 

 

 

 

 

 

“아홉 살 전에는 매일 밤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곤 했어. 왜, 흔한 무서운 이야기 있잖아. 잠든 동안 귀신이 내 머리카락을 다 세면 데려간다는 말. 그게 무서워서 머리를 꼭꼭 숨겼어. 발도 누가 잡아챌까 항상 웅크려 잠들었지. 그때는 뭐가 그리 무서웠는지 몰라.”

“어쩌다가 그걸 관뒀는데?”

“글쎄. 그 부분은 나도 잊어버렸네. 그저 어쩌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이불 밖이 무섭지 않더라. 덕분에 몸 편히 잠들게 됐으니 좋은 일이지.”

호열은 그가 풀어낸 이야기의 끝처럼 싱거운 표정을 지었다. 금요일 밤 이부자리를 준비하면서 문득 나온 일화. 제대로 된 이야깃거리라 하기도 어려운 짧은 문장들. 마지막 문장을 말했을 때의 호열은 어느새 바닥에 누워 하얀 천장 등을 응시했다. 고요한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그 이후로 세상에 무서운 게 별로 없어졌어.”

달싹이는 입술이 완전히 잠잠해지고서야 백호가 불을 껐다. 나란히 깐 이불 두 채에서 호열이 눕지 않은 자리에 들어갔다. 어두운 방에 두 사람분의 숨결, 냉장고의 울림, 시계 초침의 흔들림 따위가 나직하게 감돌았다. 거기서 백호가 한마디 견해도 꺼내지 않은 건 이야기의 주제가 호열의 과거이기 때문이리라. 호열은 언제나 과거에서 한 발짝 떨어진 자세를 취했으므로.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호열은 은근히 저와 관련된 말을 아꼈다. 대놓고 감추지는 않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행동이 실로 은근하고 자연스러워, 백호는 호열과 함께 다닌 지 두 달이 지났을 즈음에야 그의 처세술을 알아차렸다. 그마저도 호열이 털어놓은 것에 가까웠다.

 

“여기에는 나 혼자 살아.”

 

호열의 고해성사는 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이미 몇 번 본 대문 앞, 들어가지는 못했던 현관에 백호를 들이며. 신발을 한 짝씩 벗을 때마다 비밀에 한 걸음 다가선다. 백호와 비슷한 형편의 집은 중심에 들어가기까지 큰 걸음이 필요 없다. 호열은 적막한 실내를 소개하며 제 과거를 툭툭 끼워 넣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짜맞추면 그의 집은 완성된다.

 

“원래는 엄마랑 같이 지냈는데, 일 때문에 떨어지게 됐어. 회사 기숙사에 애를 데려갈 수는 없다더라.”

“아빠는?”

“그런 건 없어.”

뒷모습만 보여주던 호열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늘진 낯에 내린 웃음. 작은 움직임으로 불을 켠 호열은 벽장 속 방석을 꺼내 백호 앞에 깔았다.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웠을 때에 그늘은 가라앉고 웃음만 떠올랐다. 구름 같은 가락으로 말했더랬다. 그런 건 자기네에 없는 게 낫다고.

 

없는 게 낫다. 그 말은 예전에는 그것이 존재했음과 그 존재가 무익했다는 의미를 담는다. 간단한 말로 어두운 가정사를 밝힌 그의 태도는 밝기만 했다. 호열은 교실에서,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그랬듯이 여상히 운을 뗐다. 열린 입술에서 나온 말은 늘상의 소재가 아니나 백호는 늘상의 반응만을 보였다. 저녁놀 아래에서 다만 이리 생각했을 뿐. 이런 이야길 들려준 건 우리가 친구라서겠지.

 

과연 호열은 머잖아 백호군단이라 불리는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소리를 하였다. 진중함과 숭고함과 작위성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닌 이에게는 들려주지 않은 얘기다. 이는 분명 우정의 증표이리라. 백호군단은 엇비슷한 증표를 나눠 가져 품에 감춰두었다. 모든 증표를 무겁게 안았으나 개중 호열의 것을 더 자주 꺼내 보는 건, 이는 또 편애의 증거다. 가볍디가벼운 웃음. 딱 그만큼으로 호열을 편애했다.

 

그래서 호열이 제 옛날을 꺼내면, 세상에 오직 그와 자신만 있을 때 꺼내 보이면 잠자코 굳어있다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버린다. 갓 나온 새알을 훔치는 도둑처럼. 하나 둥지의 알은 오롯이 제 몫이며 새는 도망치지 않는다. 부드러운 난각을 집어 가슴 안에 굴려 넣으면 뜨듯한 온기가 속을 한차례 훑고 들어온다. 늘어난 무게에 흐릿한 우월감이 차오르곤 했다. 우리는 보다 더 특별한 사이다. 더 무겁고 더 긴밀하다.

 

새는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살짝 벌어진 턱, 규칙적인 숨소리에 맞추어 느리게 오르다 꺼지는 배. 머리카락은 흔들림 없이 늘어졌다. 밤이 찬 방에서 보이는 형상. 백호는 적당히 모가 난 윤곽선을 다듬고 갈아 자그맣고 둥그런 형상을 빚었다. 조용한 아이가 이불을 쥔 채 폴짝이다가 주저앉았다. 몽돌 같은 발가락이 잠깐 드러났다가 재빠르게 숨어버렸다.

 

그건 마치 생판 남 같아서, 백호는 천연스레 귀엽게 여긴다. 무엇이 무섭다고 얄팍한 보호구를 몸에 둘렀는가. 세상 두려울 게 없이 구는 너는 언제부터 나타났는가. 그 시절의 네가 앞에 있다면 나는 이불을 걷어 무서운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텐데.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쓸면서 너의 눈이 평온히 감길 때까지 기다려줄 텐데. 나는 잠든 너를 누이고 어린 코를 눌러보겠지. 이럴 때 우리가 처음부터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워진다.

 

하여 백호는 작금의 호열을 만지기로 한다. 한 팔로는 바닥을 짚고 다른 팔로는 검은 머릿결을 향한다. 바스락거리며 문질러지는 머리카락에 잠든 줄로만 알았던 호열이 눈을 뜨고,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저 무엇을 하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백호가 기세등등한 웃음을 띠고 속삭이기를,

 

“널 데려가는 중.”

 

한순간에 어둠 속 괴물을 자처하여 호열을 덮쳤다. 굵은 팔이 호열의 팔꿈치 아래를 가로질렀다. 이불째로 안아 허공으로 올리면 적막을 부수는 외침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공포보다는 환호의 성질이니. 아이들은 이불 위를 구르며 팔을 뻗고 다리를 얽었다. 철없는 웃음이 잦아들어서도 호열은 여전히 백호의 품 안이었으며, 조금 후덥지근했다.

 

어둠 사이로 눈이 맞닿았다.

 

고개를 숙이니 호열은 이미 준비되었다. 이런 유순함은 그만 아는 것이다. 닿기 전부터 감긴 눈이라든가 코에 눌리는 볼의 감촉, 혀의 맛, 아주 가까워진 호열이 어떤 식으로 백호를 받아들이고 흘리고 넘기는지, 숨이 막혀올 때의 끙 소리나 뒤통수를 간질이는 연한 손길 같은. 호열의 그런 것들을 독차지했기에 백호는 이미 놓쳐버린 것을 깊게 생각지 않았다.

 

함께 보내지 못한 그 시간 또한 백호에게만 공유해주지 않았는가. 강백호만이 상상할 수 있는 옛일, 그걸 일러줄 때의 양호열도 그만의 것이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 모두 그에게 있다. 어찌 토라지겠는가.

 

양호열의 조각을 사랑한다. 그것을 자주 꺼내 어루만지고 뜯어보길 즐겼다. 그러나 한번도 호열이 하듯이 해보지는 않았다. 벽돌과 벽돌을 짜맞추기. 파편 난 과거가 한데 모이면 벽이 되고 그것의 무늬는 어떠한 풍경이다. 코앞의 조각과 머나먼 풍경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백호는 들여다보기에만 열중해 그것을 멀리 둬 본 적 없다.

 

하늘이 낮게 울린다. 진동이 바닥까지 내려온다. 퉁. 퉁. 발돋움 후 기운찬 착지. 세상을 다 가진 듯 고조된 심장에 돌연 꽂힌 말. 잿빛이 된 친구들이 체육관에서 막 나온 그에게 다가오며 꺼낸 비수.

 

“백호야. 병원에 좀 가야겠다.”

 

호열이 아버지가 찾아왔어.

 

답답한 공기와 난잡한 소음, 불편한 침상에 얌전히 누운 양호열. 꺼벙한 환자복과 거친 붕대로 덮였지만 그 밑의 피부는 불그죽죽하다. 좁아진 눈으로 문병객을 확인한 호열이 실소했다. 말을 잃은 백호를 대신해 말했다.

 

“안녕.”

 

안녕. 안녕. 호열은 딱 그런 태도로 제게 일어난 일을 대했다. 똑같은 일상, 별다를 것 없는 사건을 겪은 듯이. 그건 사실에 가깝다. 그들에게 폭력은 얼굴 없는 친구와 비슷하다. 언제라도 끼어들 수 있으며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장 솔직하게 말하건대, 때때로 백호는 그것에 숨이 막혔다. 정신을 차리면 목 아래 압박이 느껴지곤 했다.

 

오늘 그것은 아비의 얼굴을 하고 호열을 찾아왔다. 백호는 성치 않은 호열을 보며 쥐어짜는 손아귀를 느꼈다.

 

“이곳 주소만 알아냈는지 나더러 어머니가 어딨는지 당장 말하라지 뭐냐. 여기에 당신 가족은 없다니까 바로 달려들어선… 그 양반, 다 늙었으면서 주먹은 여전히 맵더라. 쓸데없이.”

 

언제나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는 말투. 그러나 목소리는 끊어질 듯 흔들린다. 뜨였던 눈꺼풀도 금세 닫혔다.

 

“그래도 나도 더 이상 어리지 않으니까… . 결딴낼 각오로 달려드니까 당황하더라고. 죽기 직전까지 박살 내고 나나 어머니 앞에 다시 또 나타난다면 그땐 정말로 다 끝내겠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침착이 옅어진다. 눈초리와 입매가 처음 보는 형태로 구겨져 오래 묵은 염증을 뱉었다. 호열의 감정은 그가 꺼져가는 불씨 같은 지경이 되어서야 생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제대로 대꾸도 못 하고 도망쳤어. 그런 인간도 겁먹을 줄 알더라. 그런 인간도.”

 

거기까지 말한 호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호열은 의식을 잃고, 그런 호열을 둘러싼 백호군단이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다. 반 시간 뒤 그의 곁을 지키는 이는 백호뿐이다.

 

백호는 호열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눈 감기 전 들려준 이야기를 되새겼다. 오래된 이야기, 형편없는 아비에게서 도망친 가족. 아이는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처럼 행동했으나 그것은 여기까지 따라왔다. 열감이 오른 몸뚱이를 살폈다. 이불을 반만 걸친 채 잠이 든 호열. 아주 어린 시절에는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뒤집어 썼다지. 머리카락과 발목을 사수하며 불편히 웅크려 잠들었다지. 언젠가부터 귀신을 믿지 않게 되었고 그날부로 세상에 두려움은 사라졌다. 아니,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귀신을 믿지 않았나….

 

어느 순간 깨달아버리는 진실, 성장하며 자연스레 거치는 계단, 한 뼘 올라갈 때마다 트이는 시야, 그때는 놓쳤지만 지금은 아닌, 왜 이전에는 몰랐는지 이해할 수 없는 단서, 밀려오는 질문.

 

너는 언제부터 유령을 믿지 않고 언제부터 두려움을 잃었나. 네가 무서워한 대상이 낡아빠진 괴담이 맞기는 하는가. 이불 안에 갇혀있기를 그만둔 밤, 그때의 너는 무엇에 더 가까웠나. 생판 남인 것 같던 너? 내가 아는 너?

 

뭉친 머리카락이 손끝에 걸렸다. 피와 땀, 먼지가 엉겨 붙은 머리카락은 낯설지 않았으나 어떤 밤과는 확연히 다르다. 마지막으로 지은 표정도. 스치듯 본 게 전부였던 그늘이 만면에 차올라서…

 

“왜 그래?”

 

눈 감은 채로 호열이 달싹였다. 어디에서 온 손인지 이미 아는 것처럼 부드러운 말씨다. 백호는 섣불리 대답 못하고 숨을 골랐다. 이러한 나긋함은 참으로 익숙해 한번도 깊이 생각해본 적 없다. 이 성질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그저 호열이 처음부터 유연하고 강한 사람이라 믿었다.

 

생판 남인 것 같은 아이와 호열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불을 들추면 마주치던 눈. 백호가 곧잘 상상하곤 했던 덤덤한 낯. 하지만 그 눈은, 의연함은 지금의 양호열에서 따왔다. 그 아이가 어떤 눈으로 어떤 세상을 목격했는지 강백호는 모른다. 그는 호열의 과거를 본 적 없다. 만약 그것이 당장 눈앞에 있다면. 양호열의 특성, 강백호가 좋아하는 온유함 따위는 찾을 수 없는, 그저 이름만 같은 다른 아이가 앞에 있다면. 백호는 물어보고 싶다. 호열아, 너, 그때.

 

“무슨 심정으로 이불 밖에 머리를 들이밀었어?”

 

호열이 눈을 떴다. 백호를 향한 시선이 이내 아래로 떨어졌다. 모르겠어. 그 순간 호열은 정말로 남이 된다. 저 어리숙한 아이는 백호와 만난 적이 없다.

 

“그때는 나한테도 흐릿하게 남았어. 내가 피하고 싶던 게 창가의 귀신인지, 문 너머의 누군가인지. 흔들리던 방이 그저 바람 때문이었는지. 나도 기억이 안 나. 이렇게 돼서도 여전히. 그래서 가장 좋아 보인 걸 고른 거야. 네게 평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

 

호열은 후회 중일까. 중학 시절 스스로 보여준 치부가 뒤늦게 부끄러워졌는지 모른다. 혹은 백호가 호열을 편애하는 만큼 호열도 그를 편애하기에 말을 걸렀거나. 백호도 때때로 그러하니까. 도정된 언어만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평범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 한 귀로 흘려들을 만한 산뜻한 담소만을 주고 싶은 적이 많았다. 그렇기에 호열을 저의를 이해할 수 있다. 백호를 힘들게 하는 건 그걸 앎에도 호열도 그러하리란 걸 생각하지 못한, 그의 의도대로 단서를 흘려버린 자신.

 

“다음부턴 그러지 마.”

 

그저 이렇게 청할 뿐. 누군가의 의지를 멋대로 바꿀 방법은 없으므로. 애정에 기대 상처받은 티를 내는 수밖에.

 

“나는 너한테 위안을 주고 싶다고.”

 

등을 구부려 침대 여백에 이마를 대었다. 잠긴 숨소리에 호열이 손을 뻗어 백호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둔한 손길이 눈가에 닿자 손톱 밑으로 물기가 스며들었다. 연고를 문지르듯 피부 위에 원을 그리면 아파하는 소리가 깊어진다. 동작을 반복할수록 호열의 안색이 맑아졌다. 통증을 전달하는 것처럼.

 

“충분히 그랬는걸.”

 

덧없이 가벼운 대답이 천정으로 떠오른다. 이제 호열은 언젠가 받았던 손길을 따라 하며 백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날 데려가겠다고 말한 밤, 내 머릴 세어준 네 손이 좋았어. 날 안은 네 팔이 좋았어. 유년의 소원이 이루어진 기분이었지. 이제 내가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필연적으로 너의 손이 따라올 거야. 이불 밖에서 날 기다리는 건 바로 너겠지. 그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알까….”

 

손가락이 길게 백호의 옆얼굴을 가로질렀다. 다시금 수마에 잠기려는지 호열의 뒤통수가 베개에 깊게 가라앉고 닿은 손도 움직임이 느려졌다. 백호야. 나 머리 좀 넘겨줘. 노곤하게 속살거리면 백호는 여전히 젖은 숨결을 뱉어내면서도 순순히 팔을 든다. 상처를 피해 섬세히 머리카락을 누른다. 얼룩진 얼굴에 피어난 웃음은 깨끗하다. 그가 잠에 들고 한참이 지나서도 백호는 머리를 쓸어 넘기는 걸 멈추지 않았다.

 

흔들리지만 안온한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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