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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o Mars - Runaway Baby.jpg

사랑한다면 도망쳐라!

알바와 농놀

@notgoodtoseeyou

*날조주의

*백호가 호열이에게 너무함

*모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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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듯한 날씨도 어느새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가을날.

고등학생으로서 마지막 가을을 맞이한 백호는 오랜만에 백호군단을 불러모았다.

양호열만 빼고.

 

“뭐냐?”

 

노구식, 이용팔, 김대남이 툴툴거렸다. 점심시간 끝나기 15분 전, 낮잠 한숨 자기 딱 좋은 시간. 따끈한 햇살 아래서 졸음 가득한 얼굴의 세 친구가 백호를 불만스럽게 꼬라본다. 거의 늘 붙어다니던 양호열은 어따 빼먹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자 드물게 머뭇거리던 강백호가 얼굴을 제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빨갛게 붉히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나 호열이 좋아하는 거 같다.”

 

친구들은 그가 좋아하는 상대가 있다고 하면 늘 누구보다 발벗고 도와줬다(성공한 적은 없지만). 이번 상대인 양호열은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친구라는 점이 달랐지만 백호군단이라면 기꺼이 도와줄 게 틀림없다고 백호는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세 사람의 얼굴은 돌 씹은 얼굴이다.

 

“그 새끼가 결국.”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러게 내가 수상하다고 했잖아. 이거 어쩔거냐, 어?”

 

노구식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용팔이 무려 선글라스를 벗으며 미간을 움켜쥐었다. 김대남이 아침에 열심히 손질했을 머리를 스스로 헤집더니 짜증을 낸다. 친구의 짝사랑 소식을 들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반응에 강백호는 당황했다.

 

“뭐… 뭐냐? 왜 그래? 호열이가 왜?”

 

혀를 차던 세 친구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이걸 말해도 되는지 곤란한 얼굴이었다. 백호는 더욱 불안해져서 그들을 닦달했다. 세 친구들은 백호가 물리적으로 설득하기 직전 에 내키지 않는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백호야, 우리도 진짜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오해하지 마라. 진지하게 하는 조언이다.”

 

구식과 대남이 운을 떼자 용팔이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말했다.

 

“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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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도망쳐라!

W.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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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열은 좋은 녀석이지만, 남자친구로는 완전 쓰레기야.

너 고백 50번 넘게 차일 때 걔 뭐했는지 아냐?

여자친구가 50번은 넘게 바뀌었을 걸.

남자친구도 있었어.

여차친구와 남자친구가 50번은 넘게 바뀌었을 걸.

이 세상에 남미새와 여미새가 있다면 걔는 그냥 미친 새끼다.

친구로는 정말 진국이지만. 애인으로는 진짜 아니니까.

마음 못 접을 거면 차라리 튀어라.

 

어떻게 편지를 쓸지, 어디로 데이트를 가며 어떤 식으로 꼬셔야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짝남의 신랄한 뒷담을 들은 백호는 심란해졌다. 아니, 양호열이 그렇게 애인을 많이 사귀었다고. 자기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처음인데 이 새끼는 전여친으로 모자라 전남친도 몇 명이나 된다고. 심지어 양다리를 들켜서 뺨 맞고 끝난 적도 몇 번 있었고, 그 뒤로는 사귀기 전에 합의를 했다고. 듣자하니 어이가 없다.

 

“호열이가 진짜 그런 녀석이면 내가 몰랐겠냐?”

 

양호열은 가끔 어디론가 사라져 연락이 안되곤 했지만, 그런 이슈에 대해서는 무척 담백한 녀석이었다. 흔한 양아치들처럼 음담패설을 하지도 않고, 예쁜 누님이 지나갈 때 침을 질질 흘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멀리 떨어져서 작업 걸겠답시고 헛짓거리 하는 친구들 구경이나 했다. 그런 면이 더 어른스럽고 멋져보이는 녀석이었다. 물론 호열이가 좀 귀엽고 성격도 좋고 옷도 잘 입고 이 천재만큼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매력이 많아서 인기가 좀 있긴 해. 하지만 호열이는 그런 점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반기지도 않는 녀석이 아닌가. 백호의 굳은 믿음에 세 친구는 답답해 죽으려 한다.

 

“그야 너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아주 지랄을 했으니까.”

“그 자식 진짜.”

 

영 믿음이 가지 않는다. 당연하다. 백호는 지금 콩깍지가 아주 지대로 씐 상태다. 그리고, 뭐가 어떻든 천재 강백호가 지레 겁먹을 수는 없지! 도망이란 강백호 연애사전에 없는 거다. 그래서 백호는 우선 갈겨보기로 했다. 무엇을?

고백!

 

그렇게 편지지를 고르고, 편지 쓰고, 데이트 장소 고르고! 준비를 마친 후, 하교길에 양호열에게 고백을 갈긴 강백호. 새빨갛게 익어서 달달 떨리는 손이 내미는 편지를 호열은 기꺼이 받아줬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편지를 읽었다. 찬찬히 내용을 모두 읽은 호열이 놀라워 하면서도 조금 기쁘게 웃자 긴장했던 백호의 얼굴도 활짝 펴진다. 누가 봐도 수락의 미소였다! 호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백호가 몇 번이나 꿈꿨던 말을 한다.

 

“고마워, 백호야. 나도 네가 좋아.”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진다. 백호의 심장은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만큼 가파르게 뛰었다. 처음으로 승낙받은 고백이다. 가장 친한 친구와 앞으로 연인이 된다는 사실에 백호의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머리 속에서 핑크빛 미래가 무한히 펼쳐지려는데 호열의 말이 끼어든다.

 

“그런데 괜찮겠어? 나 이미 사귀고 있는 애가 있어서… 아직은 헤어지기 힘든데 너랑 사귀면서 잠깐 같이 사귀어도 될까?”

“되겠냐?”

 

설렘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다른 의미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지금 양다리 걸치겠다고 허락을? 이게 김대남이 말하던 그 합의? 이 녀석을 죽일지 살릴지 고민하던 백호는 일단 양호열의 머리통을 잡았다. 우선 요 작고 귀여운 머리를 내려쳐 고백도 취소할 겸 기억을 지울 생각이었다. 동작만으로 목적을 읽어낸 호열이 열심히 백호를 만류하려 했으나,

 

“잠깐! 알겠어, 헤어질게. 그런데 가끔 데이트는 가도 될까?”

“나랑?”

“물론 너랑도 가겠지만, 가끔은…”

 

그의 망언은 멈추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백호가 호열의 머리를 내리친다. 쾅!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충격에 호열은 가련한 모습으로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저대로 콱 버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찬 바닥에 입 돌아갈까봐 챙겨서 녀석의 집 앞에 버려둔 후 백호는 제집으로 돌아갔다. 밤하늘에는 별이 한가득인데 눈앞이 흐려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인정한다. 그 녀석들의 말이 맞다. 양호열은 미친 새끼다.

억울함과 어이없음, 분노로 밤을 꼴딱 샌 백호는 이를 득득 갈며 등교했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전 양아치 현 농구부원은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교문 근처에 마주친 정대만이 그에게 인사하려다 그 서슬 퍼런 모습에 못 본 척 지나갈 정도였다.

 

강백호는 아주 단단히 마음 먹었다. 고백을 취소할 생각이었다. 최초로 성공한 고백을 취소한다는 게 씁쓸했지만 이제는 좋아하지 않으니 고백도 취소하는 게 당연하다. 애초에 양호열이 그런 녀석인 줄 알았다면 고백하지도 않았을 거다. 대체 어떤 똘추가 바람둥이랑 사귄단 말인가?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이 천재 농구선수 강백호가 왜? 당장 가서 취소하고 박치기를 10번은 먹여줄 생각이었다. 인생 똑바로 살라고 욕도 푸지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안녕, 백호야. 좋은 아침.”

 

가을 바람과 함께 양호열이 그에게 온다. 벌써 긴 팔 교복을 꺼내 입고 까만 머리카락을 맵시 있게 넘긴 채 새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로 인사하는 양호열. 백호가 좋아하는 미소를 걸고 다가온다. 이마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여놓고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얼굴. 그 뻔뻔한 태도마저 좀 귀여운 양호열이…

 

귀여워? 백호는 제 뺨을 꼬집었다. 지금도 애인이 있는데 같이 사귀어도 되냐고 물어본 녀석이 귀여워? 제정신이냐, 강백호? 아침 드라마에서 남편이 외도를 해도 놓아주지 못해 괴로워하는 여자들을 보고 얼마나 답답하다며 욕을 했던가. 백호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왜 그래, 아프겠다.”

 

작고 단단한 손이 그의 손을 감싸쥔다. 호열의 손이다. 백호는 너무나 쉽게 힘이 풀린다. 호열은 아프겠다는 듯 백호의 볼을 쓰다듬더니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이끌었다. 백호네 교실로 가는 방향이었다. 얼결에 끌려가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호열이 돌아본다.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하는 손가락 사이로 여린 살결이 느껴졌다. 마치 청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우리 사귀는 건가?”

 

백호는 다시 백호군단을 불러모았다. 양호열만 빼고. 그들은 강백호의 표정만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했다.

 

“양호열은?”

“보건실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건데…….”

 

3m쯤 날아간 호열은 복도 벽에 처박혀 보건실로 실려갔다. 당시 복도에 있던 노구식이 유일한 목격자인 게 행운이었다. 업혀온 호열을 보고 보건 선생이 병원에 데려가야하지 않겠냐는 것을 구식과 백호가 진땀을 빼며 말렸다. 다행히 호열도 뒷머리에 왕혹이 생기고 의식을 찾지 못했을 뿐 크게 이상은 없어보였다. 구식은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도 기절은 너무하지 않았냐.”

“눗, 살짝 밀려다가 그만…”

 

양호열이 느끼하게 굴긴 했어. 솔직히 살아있는 게 기적인듯. 난 설마 백호한테도 그럴 줄은 몰랐다. 구식과 대남, 용팔이 수군거렸다. 강백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 그치만, 그 녀석이 먼저. 손, 손깍지를…!

 

강백호는 갑자기 양호열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뒤지게 설렜다. 바로 날려버리지 않았으면 결국 우주의 힘에 굴복한 백호가 ‘사귀어 주세요.’라고 다시 말했을 거다. 이 자식 날 홀리다니!!(호열은 억울하다) 여태 이런 식으로 했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매일 학교에서 보는데 대체 언제 이런 짓을 했단 말이야! 상상만으로 백호는 속이 무척 답답하고 부글거려서 불이라도 뿜고 싶었다. 실제로 그러진 못해 용팔과 대남을 탈탈 털었다. (구식은 호열의 옆을 지키겠다며 보건실로 내려갔다) 양호열이 언제부터 저랬냐고.

 

“원래 저렇지는 않았어.”

 

이 미친 짓거리가 시작된 건 작년부터라고 한다. 전에도 호열은 종종 애인을 사귀었지만, 순정만땅 강백호와 다르게 하는둥 마는둥 패션처럼 연애하더니 작년에 갑자기 훼까닥해서 기본 두셋씩 사귀거나 데이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치 분야를 개척하는 것처럼 한 명씩 늘리더니 어느 한 명 서운하지 않게 꼭꼭 숨기면서 빠짐없이 챙겼다. 구식, 대남, 용팔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한 번은 다섯다리를 들켜서 끌려갈 뻔한 것을 겨우 구해다가 대체 뭐가 문제냐고 물었더니, 양호열이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좋대잖아.”

 

백호는 어안이 벙벙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그걸 어떻게 안 들켜?”

“되게 꼼꼼하게 했어. 한 명도 빠짐없이 챙기고, 전화번호, 일정, 주로 다니는 길, 다 외우고 다니고 호칭도 정리하던데. 난 그 녀석이 그렇게 치밀한 줄 몰랐다.”

 

백호는 알고 있었다. 양호열이 얼마나 꼼꼼하고 사려깊은지, 가장 곁에서 늘 느꼈다. 그 꼼꼼함이 이런 개같은 방식으로 남들에게도 알려질 줄은 몰랐지만.

 

오전 내내 기절해있던 호열은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넉살도 좋게 백호를 찾아왔지만, 강백호는 그를 피해다녔다. 고백을 취소할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호열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면 백호는 후다닥 몸을 숨기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갔다. 3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라진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체육관에서 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북산의 핵심 주력이나 다름없는 강백호, 서태웅이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윈터컵 우승을 노리기로 한 만큼 연습을 빠질 수 없는 법. 기다렸다는듯 양호열이 체육관에 알짱거리자 부원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백호에게 인도했다.

 

“백호야, 여기 있었구나.”

 

체육관 한구석에서 물을 마시던 백호의 어깨가 들썩인다. 물이 잘못 넘어가 사래가 들렸다. 기침하는 와중에 백호가 힘겹게 말했다.

 

“왜 이렇게 안 보였어. 누가 보면 나 피하는 줄 알겠네.”

“내가 무슨, 쿨럭, 그런, 켁, 피하긴, 쿨럭쿨럭! 컥, 켁켁!”

“하하. 진정되면 말해. 물 좀 마시고.”

 

호열은 백호의 등을 두드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절대 저 녀석이 짜증날 정도로 다정해서가 아니라, 사래가 제대로 들려서. 백호의 숨이 거의 다 가라앉았음에도 등을 감싼 손은 떠날 생각이 없어보인다. 여전히 그가 제일 좋아하는 미소. 백호는 참으려 해봤다. 동그란 뒷통수에 붙은 커다란 반창고가 가엾어서라도 차분히 말로 ‘고백 취소할 거니까 저리가’ 라고 말할 참이었다. 토닥이던 호열의 손이 슬쩍 내려가지만 않았어도.

 

“꺄악, 호열아!”

 

백호는 백호군단을 소집했다. 양호열만 빼고. 그들은 강백호의 표정을 보기도 전에 무슨 일인지 알았다. 애초에 사람이 농구공도 아닌데 그렇게 허공을 날아가면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다. 이번에도 노구식이 호열을 이송한 탓에 용팔, 대남만이 짜게 식은 눈으로 백호를 비난했다.

 

“양호열도 양호열이긴 했는데.”

“이번에는 백호 네가 너무했다, 진짜.”

“아, 아니 저 녀석이 먼저 내 허리를!”

 

허리가 뭐. 백호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호열은 백호가 1학년 때 수술한 등허리 쪽이 걱정되어서 짚었던 거 같기도 하다. 대남이 혀를 쯔쯔 찼다.

 

“난리 치는 걸 보니 아직 마음 못 접었네.”

“에휴, 그러게 진작 튀지. 다들 이런다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용팔이 선글라스를 추켜올린다.

 

“저번에 다섯다리 들켜서 끌려갈 뻔 했다고 했잖아. 그 뒤로 어떻게 되었겠냐?”

 

이야기는 이렇다. 끌려갈 뻔 했다가 백호군단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난 양호열은 사귀던 이들에게 모든 진실을 밝혔다.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양호열의 연인들은 대부분 호열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그를 떠났지만, 그를 떠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가엾은 바람둥이의 연인은 호열과 1년을 사귀다 전학을 가면서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아니, 바람을 피우는 걸 알고도 계속 사귄다고? 대체 왜?”

“모르지. 알면서도 왜 그랬는지.”

“되게 힘들어 보였어. 우린 너가 그러는 거 보고 싶지 않다.”

 

부활동 시간 내내 뭐 마려운 개처럼 집중하지 못하던 강백호는 매니저 채소연이 다녀오라고 등을 밀어주고 나서야 양호열이 누워있는 보건실로 향했다. 침대로 다가가니 이제는 뒷통수에 모자라 이마에도 커다란 반창고를 붙였다. 앞뒤로 붙였더니 떨어지지 마라고 붕대도 두른 게, 제법 우스운 꼴이다. 그러나 백호에겐 그 모습마저 귀엽게 보였는데, 아니? 누가 바람둥이를 좋아해? 똘추 호구도 아니고. 백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번에는 말하리라. 이제는 안 좋아한다고. 고백 취소한다고.

 

어느새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백호가 커튼을 걷자 노을이 길게 늘어져 호열의 얼굴에도 드리웠다. 잠시 기다리자 호열이 정신을 차린다. 속눈썹이 떨리다가 천천히 움직이며 눈동자가 드러나는 걸 빤히 바라보았다. 햇살에 약간 찌푸려진 얼굴이 백호와 마주치자 기꺼이 웃는 얼굴로 바뀌는 걸 바라본다.

 

“백호?”

“…….”

“너 임마, 아침에도 그렇고 사람을 그렇게 밀면 어떡하냐. 아, 골이야.”

 

타박하면서도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 호열이 몸을 일으켰다. 하루 내내 기절했던 거 같은데 벌써 하교시간이냐며 놀라워한다.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어서 집에 가서 저녁을 먹자며, 오늘 같이 먹기로 했지 않냐며 백호가 좋아하는 메뉴를 말한다.

 

노을 탓일까? 백호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양호열은 다정하니까. 다른 사람이랑 사귀지 말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내 앞에서만 안 보이면 괜찮지 않을까? 아냐, 그래도. 그래도 혹시 모르지. 그치만. 그의 마음이 갈대같이 흔들렸다.

 

“양호열, 나 할 말이 있다.”

“뭔데?”

 

침을 꿀꺽 삼키고 백호가 어제의 고백에 대해 언급하려는 때, 보건실의 문이 열린다. 처음보는 얼굴에 낯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아, 저. 호열이가 여기 있다고 해서… 호열아!”

“영희야, 왔구나.”

“무슨 일이야? 갑자기 불러서 놀랐어.”

 

학생이 민망하다는 듯 볼을 붉히며 백호를 흘낏거렸다. 강백호는 저 아이가 호열의 여자친구(혹은 여자친구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쁘장한 그 학생은 쪼르르 호열의 병상으로 다가오더니 어디 다쳤냐며 걱정스럽게 말을 붙였다. 둘은 익숙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여학생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방금까지 농구하다 와서 땀을 흘린 백호와 무척 달랐다. 학생은 자꾸만 백호를 흘끗거린다.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아, 영희야. 여기는 백호. 우리 하던 얘기가 있었는데…”

“돼, 됐어! 나 간다. 좋은 시간 보내시구요.”

 

불청객인 것처럼 후다닥 뛰쳐나온 강백호는 급하게 가방을 챙기고 도망치듯 학교를 벗어났다. 어느새 하늘이 깜깜했다. 가로등 빛 아래를 순식간에 뛰어 백호는 집으로 도망갔다. 왜 이렇게 빠르게 뛰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슴이 쿵쿵 뛴다. 집에 막 도착해 열쇠를 뒤지고 있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강백호!”

 

양호열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열심히 세팅한 머리카락도 헝클어졌다. 거친 숨을 내쉬며 전봇대를 짚는 모습에 백호가 움찔 놀라 다가간다.

 

“뭐, 뭐야. 어지럽냐?”

“너무 숨이 차서. 휴우, 죽겠네. 달리기 엄청 빠르네. 왜 먼저 갔어?”

“아니 아까 그 분… 여자친구 아니냐. 난, 그냥 둘이 있으라고.”

“뭐어? 우리가 먼저 같이 저녁 먹기로 했잖아.”

 

이 녀석은 늘 그랬다. 기꺼이 백호를 우선으로 뒀다. 백호가 좋아하는 메뉴를 먼저 고르게 했고, 찡그리다가도 백호를 보면 웃었다. 지금 뿐만이 아니다. 등을 맞대고 싸웠을 때, 경기에서 그를 응원할 때, 일주일에 서너번 씩 와서 병원에서 자고 갈 때, 피곤해하면서 새벽마다 같이 연습 올 때, 그의 성공적인 복귀에 같이 울었을 때, 양말에 구멍이 났다며 꿰매줄 때, 자기도 배고프면서 백호에게 한 입 먹으라며 선뜻 내밀 때, 여자친구를 두고 저에게 달려올 때, 셀 수도 없다. 양호열이 그럴 때마다 백호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할 말 있다며.”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배신감에 우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양호열이 좋다.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걸 봤는데도 저 녀석이 좋다. 너무너무 좋다. 사귀고 싶다. 그런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도 데이트할 걸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다. 백호는 양호열이 바람을 피운 걸 알면서도 계속 사귀었다던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것만 같다.

친구들이 도망치라고 한 이유도 이제 알 것 같았다.

너와 나는 마음의 크기가 다르다.

 

“백호야, 갑자기 왜 울어…”

“너한테 고백했던 거, 취소야.”

“엇, 어, 어, 왜?”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얼굴. 손수건을 내미는 양호열의 손을 살짝 잡는다.

어쩌면 그가 고백을 받아준 게 기적이었다. 고백하기로 마음 먹은 계기부터가 엉망진창이었으니까. 형편없는 이유로 고백했던 만큼 형편없는 이유로 백호는 도망치기로 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미국 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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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호열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면, 그는 변명할 거리가 없다. 그가 미친 문어발식 연애를 시작한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으니까.

 

“너희도 좋아하는 걸 찾아보는 게 어때?”

 

그 말에 호열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뭘 좋아할까. 나도 강백호처럼 저렇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게 있을까?

 

좋아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다. 중학생 때 얼결에 고백을 받아준 이후로 거의 끊임없이 누군가와 사귀었으니까. 그와 사귀는 사람은 하나같이 그에게 좋아한다고 했다. 가끔 사랑한다는 말도 있었다. 백호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좋아함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금방 시들었다. 가장 길게 버틴 사람이 1년이었다. 백호는 부상을 입었어도 3년째 농구를 하는데.

 

그러다 작년,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걸 백호를 제외한 백호군단에게 들켰다. 굳이 숨기지는 않았지만 말하지도 않았더니 친구들은 무척 성을 냈다. 호열이 애인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하게 대한다는 걸 알자 마구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바쁘고, 딱히 재미도 없고.”

“네가 뭐가 바빠? 백호도 퇴원했는데!”

“연애가 뭔지는 아는 거야?”

“그럴거면 왜 사귀냐?”

 

그야 싫은데도 사귀는 건 아니니, 싫고 좋고를 가른다면 좋은 편이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따지자면 좋아하나? 호열이 아리까리한 표정을 짓자 친구들은 빡쳐했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한데 왜 저 양철나무꾼 새끼한테만 연애운이 몰빵되어 있는지.

 

“됐다! 기왕 사귀는 거 너도 노력해봐. 그러다보면 진짜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냐.”

 

‘진짜 좋아하게 되다.’ 무엇을 좋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호열이 그 말에 꽂힌 것이다.

그 뒤로 정말 ‘노력’이 겸비된 연애를 했다. 오는 사람을 막지 않았더니 사람이 많아지기도 했다. 그러다 탈이 난 이후로는 양해를 구했지만, 그럼에도 오는 사람은 왔다. 나름 재밌을 때도 있었다. 시간과 동선을 체크하고 스케쥴을 취합해 데이트 경로를 계산하다보면 무언가 열심히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호열은 이제 문어다리 생활도 슬 청산해볼까 싶었는데. 백호의 고백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조, 조, 좋아합니다! 저랑 사귀어주세요!”

 

처음에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가을 바람이 너무 좋아서 백호의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나 싶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는 장난인가 싶어서 편지를 받아 읽었다. 양호열에게. 강백호가.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확하게 두 사람인 평균 실력의 러브레터. 아무래도 백호는 호열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호열은 기꺼이 받기로 했다. 백호라면 이미 스케쥴과 호불호를 모두 숙지하고 있어 따로 알아가고 조사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고보니 백호는 처음 고백을 성공하는 거 아닌가? 종이꽃이라도 뿌려줘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호열은 대수롭지 않게 제 연애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합의를 구했다.

 

쾅! 그리고 암전. 다시 깨어났을 때는 집이었다. 박치기를 당하고 기절하자 호열의 집에 두고 간 모양이다. 추울까봐 이불까지 덮어주고 갔다. 아무래도 정말 양호열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음날, 학교에서 백호는 호열을 피해다녔다. 호열은 그게 수줍음이 많은 탓이라고 짐작했다.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친구였던 자신에게도 그럴 줄은 몰랐다. 스케일이 다른 수줍음에 호열은 자꾸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기절했다. 부상이 점점 늘어났지만 호열은 계속 백호를 찾아갔다. 일편단심밖에 모르는 백호를 위해 다른 애인들도 모두 정리했다. 오늘 만난 영희도 그 중 하나였다.

 

헤어지자는 말에 울상을 짓는 전 여자친구를 두고, 백호를 따라잡기 위해 호열은 힘껏 달렸다. 예감이 좋았다. 백호와 함께 하는 건 뭐든지 즐거웠고, 즐겁지 않아도 좋았다. 그와 함께 하는 건 연애라도 무척 재밌을 거 같았다. 그러나 백호는 울고 있었다. 그는 또 예상을 뛰어넘는다.

 

“나, 미국 가거든.”

 

좋은 제의가 왔다고 한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경기를 뛸 거라고 한다. 축하할 일인데 선뜻 축하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억지로 꾸민 미소와 함께 그를 껴안고 소리질렀다. 울고 있던 백호는 그제야 웃었다.

 

그가 비행기를 타고 떠나고 나서야 호열은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깨달았다.

참 뻔하게도, 강백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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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의 크립토닷컴 아레나는 오늘 한바탕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떠오르는 신예, 아시아에서 온 괴물 신인 KANG이 상대팀과 박빙의 승부를 펼치다가 마지막 쿼터에서 버저비터를 올리며 역전승을 했기 때문이다. 도파민이 폭발한 관중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얼마나 높고 빨랐는지, 얼마나 핫했는지에 대해 떠들었다.

 

관중들이 빠져나가자 선수들도 퇴근길에 올랐다. 오늘 좋은 경기를 펼쳤다며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차에 올라타 사라진다. 오늘 가장 많이 찬사를 들은 KANG, 강백호도 뒤늦게 제 자동차로 향했다.

 

차키를 찾고 있으니 발소리가 들린다. 돌아보자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호열아!”

 

성인이 된 양호열은 어른의 느낌이 물씬 났다. 젖살이 빠져 갸름해진 얼굴에 머리카락은 요즘 스타일로 멋을 냈고 맵시 있는 네이비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겨울 바람에 코가 빨갛게 언 호열이 웃으면서 팔을 벌리자 백호는 기꺼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둘은 백호의 집으로 가 근황에 대해 실컷 떠들었다. 평소에도 전화나 편지를 자주 했지만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하는 건 또 달랐다. 강백호가 집 안 어딘가에 박혀있던 선물받은 양주를 꺼내오자 분위기는 더 무르익었다. 한 병을 비우자 호열은 눈이 슬슬 감기기 시작했다. 취기에 꼭꼭 숨겨놓았던 말이 새어나오려 했다.

 

성인이 된 강백호는 더럽게 핫해졌다. 눈썹과 머리에 스크래치를 내고 피어싱까지 했다. 키는 2m에 가깝고 벌크업을 해서 몸집이 아주 산만하면서도 날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예쁜 곳이 없었다. 자각한 타이밍이 개같이 망한 탓에 그냥 평생 품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이러다가 실수로 고백이라도 할 거 같았다. 술이 다 떨어졌으니 근처 슈퍼마켓에서 사오겠다며 백호가 나간 사이 호열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백호군단에게 화상 전화를 걸었다. 백호는 빼고.

 

“얘들아, 나 백호 좋아하나보다. 어떡하냐.”

 

호열은 돌아올 반응을 예상했다. 어쩐지 미국 존나 자주 가더라. 어떻게 친구를 좋아하냐. 결혼하지 않을 거면 사귀지 마라. 그래도 축하한다. 등등을 기대하는데, 정작 세 사람의 얼굴은 돌 씹은 얼굴이다.

 

[그 새끼가 결국.]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러게 내가 수상하다고 했잖아. 이거 어쩔거냐, 어?]

 

노구식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용팔이 무려 안경을 벗으며 미간을 움켜쥐었다. 김대남이 아침에 열심히 손질했을 머리를 스스로 헤집더니 짜증을 낸다. 친구의 짝사랑 소식을 들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반응에 양호열은 당황했다.

 

“뭐… 뭐냐? 왜 그래? 백호가 왜?”

 

혀를 차던 세 친구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이걸 말해도 되는지 곤란한 얼굴이었다. 호열은 더욱 불안해져서 그들을 닦달했다. 세 친구들은 호열이 통화를 끊을 거라며 협박하기 시작하자 내키지 않는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호열아, 우리도 진짜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오해하지 마라. 진지하게 하는 조언이다.]

 

노트북이 닫힌다. 어느새 도착한 강백호가 입꼬리를 올린 채 호열을 응시하고 있었다.

 

“튀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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