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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헤어져야 했던 이유 - 비비.jpg

그때 우리는

탄산수

@Sw_Shohoku

비비 - 우리가 헤어져야 했던 이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한참 지난 옛말이다. 이제는 계절을 따라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세상이었다. 티라미수 케이크가 맛있던 아기자기한 개인 카페는 텅 빈 유리창 위로 임대 안내문이 붙어있었고, 낡은 70년대 무허가 주택을 개조해 운영해 왔던 오래된 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주차장이 들어섰다.

신호에 걸린 택시가 멈춰서자 백호는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뻥 뚫린 창문으로 밀려든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지럽힌다. 여름 내내 숨 막히게 했던 더위도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차창 너머로 도시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함께 거닐었던 거리, 함께 떠들었던 카페, 함께 다녔던 맛집. 이 반갑고도 낯선 도시에는 호열과의 추억이 빼곡히도 들어차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리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은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두세 번 바뀌는 동안 차가 꼼짝도 못 하는 걸 보니 앞쪽에서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이럴 땐 걸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네, 매니저님! 길이 좀 막혀서요. 그러니까요. 한국 너무 오랜만에 와서 끔찍한 러시아워를 잊어버렸네요, 하하! 최대한 시간 맞춰서 가겠습니다. 기사님! 저 여기에 내려주십쇼.”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겨나고, 변하고, 또 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핫한 글로벌 농구 스타도 옛말이었다. 강남 한복판을 걷고 있어도, 모자를 깊이 눌러쓰지 않아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간혹 놀란 듯 ‘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본능적으로 입을 가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바쁜 사람들은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백호는 저를 알아보는 이에게는 싱긋 웃어주며 길을 걸었다. 5년간 미디어 노출이 전혀 없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백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눈길을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를 느긋하게 거니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NBA에서 슈퍼 루키로 이름을 날리고 2년 연속 MVP까지 수상했어도 미국에서는 철저히 이방인에 불과했는데. 이곳에서는 그저 군중 속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니. 사람들 틈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다는 건 쉬이 체감하기 힘든 커다란 자유였다.

내가 자유로워진 만큼, 너도 자유로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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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에이전시에 발을 들인 건 백호의 뜻은 아니었다.

“나는 싫다니까! 나는 운동으로만 유명해질 거라고!”

“누가 너더러 연예인 하래?!”

“그럼 내가 매니저가 왜 필요해!”

“운동선수도 매니저가 필요해!”

“니가 내 매니저잖아!”

강남 한복판에서 목청껏 소리치고 있는 스물한 살의 혈기 왕성한 두 남자에게 순식간에 이목이 쏠렸다. 백호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자 주변의 웅성거림도 점점 커졌다. 몇몇은 핸드폰까지 꺼내 들었지만, 정작 살벌한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기세에 눌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백호는 씩씩거리며 싫다고 말할지언정 제 굵은 손목을 잡아끄는 호열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회의실은 깔끔했다. 미팅은 대체 언제 잡은 걸까.

대학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을 오가며 활약한 강백호는 단숨에 스타 플레이어로 떠올랐다. 그런 백호에게 방송, 광고, 화보 등의 섭외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처음에는 학교에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섭외 연락이 늘어나자 학교 측은 백호에게 난색을 표했다. 급기야 업무 처리를 위해 전달된 백호의 개인 연락처가 공공재처럼 떠돌게 되고서야 백호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때 매니저를 자처하고 나선 게 호열이었다. 호열은 백호에게 쏟아지는 섭외 연락을 정중히 거절하며 스케줄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틈이 날 때마다 백호가 출전하는 경기를 관람하곤 했다. 경기가 있든 없든 늘 함께 붙어 다녔고, 당연히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에이전시를 소개해 주겠다니. 이제 자기는 빠지고 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겠다는 말 아닌가? 백호는 섭섭한 마음에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난 농구로만 슈퍼스타 하면 된다고 했잖아.”

“알아. 나도 백호 니가 싫다는 걸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어. 에이전시에도 광고나 화보는 싫어한다고 다 얘기해 놨어. 방송은 들어보고 결정하고 싶다고.”

“어…… 그르냐?”

“응.”

“……그러면 너 이제 나 버리는 거냐?”

“뭐라고?”

“여기 사람들한테 나 맡기면 이제 너랑은 못 다니는 거냐.”

“참나. 내가 널 왜 버려?”

호열은 피실피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대학 소속팀에서 모든 걸 다 챙겨주실 순 없잖아. 학생이 너 하나도 아니고 말이야. 국가대표 관련된 거야 선수촌에서 챙겨주시지만, 그런 거 말고는 전부 다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하잖아. 매니저가 생기면 내가 옆에서 돕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럼 너 이제 내 매니저 안 하는 거냐? 난 호열이 니가 해주는 게 제일 좋은데.”

“백호야. 나도 계속 하고 싶어. 근데 미국 가려면 전문적으로 준비해야 한대. 찾아보니까 우리 같은 애송이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잖냐.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냐? 지금 너한테는 1분 1초가 귀한데. 차라리 전문적으로 도와줄 전문가가 옆에 있는 게 훨씬 낫지. 안 그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백호가 고개를 숙이자 호열은 은근슬쩍 옆으로 붙으며 손을 잡아왔다.

“백호야.”

“……왜.”

“나 어디 안 떠나. 언제나 강백호 1호 팬이고 1호 매니저야.”

고개를 살짝 숙여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을 감추려던 백호는 그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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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넘어져 본 사람은 다시 일어나 뛰는 법을 안다. 열일곱에 일어난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성공적으로 복귀한 강백호는 전국대회 우승, 국가대표 발탁, 아시안 게임 우승까지 한계를 모르는 사람처럼 질주했다. 그리고 스물셋의 가을, NBA에 혜성처럼 등장해 ‘The Redhead’로 불리던 강백호는 데뷔 첫 시즌에 Rookie of the Year를 수상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7년간 NBA를 휩쓸며 종횡무진 활약하던 주장 강백호는 세 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화려하게 은퇴했다.

“네, 그러면 광고 두 건, 화보 세 건, 공중파 예능 하나랑 유튜브 예능 하나, 이렇게 출연하시는 걸로 정리하겠습니다. 긴 시간 미팅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면 강 심판님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올 때도 택시 타고 왔어요. 수고하십쇼!”

은퇴 후 강백호는 한국에 머무르며 각종 예능에 출연해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7년간 몸담았던 소속팀의 열렬한 추천에 힘입어 두 번째 유학길에 올랐다. 그렇게 다시 5년. 심판 수업을 마친 강백호는 최초의 NBA 선수 출신 아시안 심판이 되어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국제 농구 심판이 되기 위해 돌아온 참이었다.

어릴 때는 뭣도 모르고 운동만 할 거라고 그렇게 뻗댔었는데. 운동으로만 유명해지겠다고 징징거리던 스물하나의 청년은 사라졌고, 광고와 화보, 예능을 마다하지 않고 찍는 서른여섯의 아저씨만 남았다. 자본주의에 굴복한 어른이라고 자조했지만, 사실은 어딘가에 있을 호열에게 제발 저를 좀 봐달라고 외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건물 밖으로 나온 백호는 홀가분한 걸음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혼자 우뚝 솟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낮았나? 가만히 다시 살펴보니 건물은 그대로였지만 양옆으로 더 높은 새 건물이 들어선 탓이었다. 하긴 그게 벌써 십오 년 전이니, 주변이 바뀐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백호는 천천히 걸으며 시원한 가을바람을 만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청명했고, 적당히 따뜻한 햇살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NBA에 데뷔하고 슈퍼 루키, 핫가이로 불리고 나서부터는 평범하게 외출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문 밖을 나서면 끈질기게 따라붙는 파파라치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이 드러나는 세상에서 살았는데. 이곳에서는 각자 바쁜 사람들이 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곁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 사이를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문득 맞잡은 손을 흔들며 천천히 걸어가는 커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그냥 예뻐 보였다. 두 사람의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괜히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에 시선을 돌렸다.

호열이는 밖에서 손잡는 걸 싫어했다.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질색을 했었다. 손잡는 건 안 되지만, 또 어깨동무는 괜찮았다. 오토바이 뒤에 타 허리 끌어안는 것도 괜찮다고 했던 걸 보면, 호열이는 친구로 보이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을 거다. 하도 싸우다 보니 결국 사람이 없는 어두운 골목이나 공원에서만 손잡고 걷는 것으로 타협했었는데. 그때는 아무도 우릴 신경 쓰지 않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조심하는 거냐고 화를 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호열이의 말이 전부 옳았다.

만약 그때 호열이가 내 고집을 못 이겼다면, 그래서 우리가 손을 잡고 다녔다면 사귄다는 소문이 돌고도 남았을 거다. 지금 내 시선이 커플의 손에 머물렀던 것처럼, 누군가 봤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지금보다 SNS가 활발하지 않을 때였으니, 아마 목격담으로 퍼졌을 것이다. 강백호 선수 게이라고. 같이 다니는 매니저가 친구라던데 사실은 둘이 사귀는 것 같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호열이가 가장 경계했던 게 그런 거였을 거다.

백호는 코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렴풋이 그때 호열이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이제야 그 마음을 이해하다니, 참 빵점짜리 남자친구였다. 그땐 어렸고 모든 게 처음이라 많이 서툴렀다는 변명을 해보지만, 사실 그걸로는 부족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더 잘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우리 조금은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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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군단 녀석들과 술자리가 벌어졌다. 늘 함께일 것만 같던 백호군단도 성인이 되자 자연스레 흩어졌다. 어릴 때는 늘 함께였는데, 이제는 이렇게 모이는 것도 시간을 내야 했다. 달라진 삶의 궤도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모인 만큼 다들 할 말이 많았다. 기울이는 술잔 위로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가 쌓여갔다. 일찍이 사회에 나간 구식은 사회에서 만난 형님과 누님들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대학에 들어간 용팔이는 과대를 맡고 개그맨으로 불리며 학과 내 인기남이 되어 있었다. 부모님의 성화에 재수학원에 처박혀 있던 대남은 더욱 삐쩍 마른 몰골로 빌어 처먹을 입시제도를 비판하고 있었다.

어느새 인원수보다 불어난 술병이 줄지어 늘어섰다. 자기 주량은 자기가 잘 안다고 으스대던 녀석들은 취기가 오르자 점점 주절주절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건 호열도 마찬가지였다. 호열이 슬쩍 무게를 실으며 기대오자 백호도 자연스레 팔을 들어 동그란 어깨를 감쌌다.

“호열아 물 마셔.”

백호가 입가에 물컵을 갖다 대자 호열은 넙죽 물을 받아 마셨다. 재수학원의 같은 반 여학생이 저를 대하는 게 호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꽃집 사장 누님이 저에게 하는 행동이 관심 표현인 건지 열띤 토론을 벌이던 세 사람이 일순간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야, 니네 둘이 사귀냐?”

정적을 깬 건 대남이었다. 백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호열은 놀란 눈으로 퍼뜩 몸을 일으키며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사귀긴 뭘 사귀어? 얘랑 나는 그냥 친구지. 너는 머릿속에 연애 생각만 들어있어서 남들도 죄다 연애하는 걸로 보이는 거야?”

“아까도 봐라? 강백호가 양호열 앞으로 음식을 끌어다 놓질 않나, 취해서 지한테 기댄 애한테 물까지 먹여주고 한다고? 양호열이야 맨날 백호 챙겼다고 쳐도 천하의 강백호가? 뭔 여자친구냐?”

“여자친구? 하하. 내가 여자면 백호랑 안 사귀지. 얘 손 진짜 많이 가. 나는 나랑 사귀지. 그리고 대남이 너는 친구 사이에 그냥 호의로 챙겨주고 하는 거도 다 오해하는 게 문제야. 그러니까 네가 연애를 못 하는 거야.”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 눈은 못 속여. 하는 거 보면 딱 보여. 사내 자식들이 간지럽게 뭐 하는 짓이냐? 만약에 니네 둘이 안 사귀잖아? 그러면 니네 진짜 이상한 새끼들이야.”

자기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로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대남의 모습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호열은 이 관계를 당분간 비밀로 하자고 했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이라면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백호가 복잡해지는 생각에 열 오른 귓바퀴를 문지르고 있는데, 별안간 구식이 핀잔을 줬다.

“에헤이~ 김대남 이 새끼 취했네. 시끄러우니까 그만해. 니들은 뭔 개소리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어? 딱 보면 몰라? 이 새끼 재수학원에만 처박혀 있어서 그런가 초딩 수준으로 퇴화했다니까. 김대남 니는 철 좀 들어라. 그리고 명색이 얘가 강백호 매니저인데, 월급도 안 받으면 강백호가 이 정도는 챙겨도 되지. 안 그래?”

“맞아. 그리고 대남이 너도 대학 가보면 알게 돼. 서로 취하지 말라고 물 챙겨주고 서로 기대고 그런다니까. 그냥 친구끼리도 다 그런다. 안 그러냐 백호야?”

“체대는 술자리 많이 없어서 잘 몰라.”

“아휴~ 시팔. 재수생 서러워서 살겠나.”

담배를 꺼내 문 대남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나섰다. 대남이 나가는 뒷모습을 확인한 구식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말을 이었다.

“니네 둘이 맨날 붙어 다니니까 여자친구가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지. 내가 호열이 소개팅 해준다고 했는데 맨날 바쁘다고 거절했다니까. 내가 봤을 땐, 백호가 너무 바쁜 게 문제야.”

어묵탕을 흡입하던 용팔이 소개팅 얘기를 꺼내자 호열의 술잔을 채우던 구식이 말을 보탰다.

“하긴 백호 녀석이 좀 바쁘냐. 연락하면 맨날 학교 경기 나갔대고, 뭐 좀 있으면 국대 경기라 그러고. 맨날 바쁘지. 호열이는 매니저가 되는 바람에 그 스케줄 다 따라다니고. 너 월급은 좀 받냐?”

“하하. 월급은 없는데, 나중에 백호 잘 되면 집 사달라고 할 거다.”

호열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받아치자 구식은 백호를 나무랐다.

“강백호. 넌 인마, 진짜 성공하면 호열이한테 잘해야 돼. 호열이가 매니저 일 하느라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잖냐.”

“그런 거 아니거든? 호열이도 연애할 시간은 있을걸.”

“하하, 아주 웬수가 따로 없다. 지겨워 죽겠다.”

사실 매니저 일을 방패 삼아 연애하느라 맨날 붙어 다니는 거나 다름이 없다. 백호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호열을 보고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야, 백호 표정 봐라. 고백했다가 차였을 때 표정인데?”

“어? 진짜 그러네? 설마 호열이를 짝사랑이라도 했던 거냐?”

구식과 용팔이 우스갯소리를 하며 백호에게 주목하자 호열은 재빨리 잔을 들어 올리며 두 사람을 재촉했다.

“헛소리 말고 짠이나 하자!”

이어진 술자리는 고루했다. 구식은 출근해야 한다며 먼저 자리를 떴고, 용팔과 대남은 술집을 나와서도 3차를 외쳐댔지만, 호열은 백호의 컨디션을 핑계 삼아 자리를 빠져나왔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번화가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니 세상이 다 조용해진 것만 같았다.

긴장이 풀리자 술기운이 몰려왔다. 나른해진 호열이 소파에 몸을 기대자, 백호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양말을 벗겨냈다. 산처럼 커다란 녀석이 손바닥만 한 발을 감싸 쥔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호열은 기분 좋게 웃으며 양손으로 백호의 뺨을 쓰다듬었다.

“우와~ 잘생겼다. 누구 남친인데 이렇게 다정하세요?”

“양호열 남자친구지.”

“진짜요? 와~ 자랑하고 다녀야지. 내 남자친구라고. 동네방네 소문내야지. 세상 사람들~ 우리나라의 슈퍼 루키! 대학 리그의 최고 스타가 나랑 사귄다!”

“진짜 소문낼 거야?”

“그럴까? 기자한테 우리 사귀는 사이라고 확 제보할까?”

호열은 점점 취기가 오르는지 평소라면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 말을 늘어놓으며 눈이 휘어져라 웃었다. 듬뿍 쏟아지는 애정 표현 속에서 호열을 바라보던 백호의 얼굴은 점차 서글픔으로 물들어갔다. 몇 번이고 말을 삼키던 백호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근데, 꼭 그렇게까지 말했어야 했냐?”

“뭐?”

“아까 말이야. 장난으로 받아칠 수 있었잖아. 그냥 ‘어, 우리 사귀어.’ 이러고 넘어갈 수도 있었잖아. 그러면 애들도 장난으로 받았을 거야. 근데 그렇게까지 싫은 티를 내야 돼? 그리고 우리 사귀는 거, 군단 녀석들한테는 말해도 되는 거 아냐?”

“백호야,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 알잖아, 너도. 그냥 거짓말로 연기 좀 한 거야.”

“알아. 니가 우리 사귀는 거 안 밝히는 게 좋다고 한 것도 알아. 그래도 기분 나빠. 걔네한테도 말 못하면, 우린 누구한테 말해? 세상 모든 사람들한테 거짓말해야 돼? 그럼 우리가 사귀는 건 누가 알아주는데?”

“누가 꼭 알아줘야 해? 나는 우리 둘이 서로 좋아하고, 그래서 지금 사귀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백호 네 커리어도 생각해야 하고.”

“호열이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누가 그런 거 생각해 달래? 우리가 사귀는 건 맞아? 우리가 사귀는 것도 거짓말 아니야?”

“뭐라고?”

“나 씻을래.”

호열을 향해 언성을 높이던 백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로 사라졌다. 백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열은 양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 와중에도 이 오래된 집이 방음만큼은 잘돼서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하는 자신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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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이런 배려 필요 없다고 왜 세상에 숨기냐고 툴툴거렸는데. 내놓지 못하는 사랑에 이게 죄도 아니고 내가 도둑놈도 아니고 왜 그래야 하냐며 이게 사랑이 맞냐고 몰아붙였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안다. 스킨십을 하거나 대놓고 표현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의 배려 또한 사랑이었다는 걸. 숨기려던 게 아니라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운동으로만 빛날 수 있게 최선을 다한 사랑이라는 것을.

씁쓸한 마음에 애써 웃으며 걷다 보니, 같은 색깔이지만 디자인이 다른 티셔츠를 각각 입은 사람 둘이 손을 잡은 채 백호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겉모습만 봐서는 성별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이제는 자신의 성향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이 부ᄍᅠᆨ 늘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대놓고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호열이는 같은 팔찌 하나도 질색했는데, 지금은 저런 사람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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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에서의 첫 시즌을 마치고 귀국한 백호에게 모처럼 여유가 생겼다. 다음 시즌을 위한 준비와 국가대표 소집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사이 잠깐의 휴식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달력을 보며 무언가 생각하던 백호는 노트북을 켜 호텔과 기차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 뒤, 백호와 호열은 어느 해변의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휴가철치고는 한산한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제법 붐볐다. 두 사람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풍경을 감상했다. 사람들은 백사장에 자리를 잡고 저마다의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간간이 신이 난 아이들이 지르는 높은 비명이 한데 어우러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들고 다시 해변을 따라 걸었다. 관광지답게 해변가에는 단층 주택을 개조한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가게 앞에 내놓은 매대마다 온갖 자잘한 기념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조개껍데기로 만든 장식품부터 각종 열쇠고리, 팔찌, 목걸이 같은 것들. 관광객들은 가게 앞에 멈춰 서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기념품을 하나씩 사 들고 갔다. 그중에는 친구들끼리 놀러 온 듯 같은 팔찌를 손목에 차고 커플 아이템을 샀다며 웃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백호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더니 한 매대 앞으로 다가갔다.

“호열아. 우리도 저거 사자.”

백호가 가리킨 매대에는 알록달록한 실에 구슬을 꿴 팔찌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평범하고 흔해 보이는 팔찌인데도 무슨 원석으로 만들었다며 쓸데없이 가격이 비쌌다.

“뭘 이런 걸 사. 돈 아깝게.”

“이쁘잖아. 우리 둘이 하나씩 하자.”

호열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백호는 형형색색의 팔찌를 집어 들어 제 손목과 호열의 손목에 차례로 대 보며 신중하게 고르기 시작했다. 호열은 손목은 내주면서도 백호의 행동을 만류했다.

“어차피 이런 거 하고 다니지도 않아. 불편해.”

“아까 보니까 친구들끼리 왔던데 커플템이라고 사더라. 우리도 하나 하자. 이쁘잖아. 아줌마! 이거 두 개 주세요!”

“야, 강백호. 사지 말라니까?”

마침내 마음에 드는 색깔을 골랐는지, 백호는 호열의 만류에도 카드를 꺼내 사장에게 건넸다.

“맞아. 요즘은 친구들끼리도 우정 팔찌 많이 해요. 놀러 왔으면 이런 거 하나쯤 기념으로 사야지. 예쁘네!”

언제 결제를 마친 건지 카드를 돌려주며 한마디 거드는 가게 사장의 말에 호열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백호는 카드를 돌려받자마자 팔찌 하나를 제 손목에 끼우더니 호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야, 잠깐만.”

“가만있어 봐. 됐다!”

호열의 손목에 팔찌를 채운 백호는 두 사람의 손목을 나란히 들어 보였다. 색깔만 다를 뿐 누가 봐도 같은 디자인의 팔찌였다.

“봐라. 잘 어울리지?”

“그래, 예쁘네.”

확실히 예쁘긴 했다. 그렇다고 그 비싼 값을 치를 만큼 특별한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백호가 그토록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말렸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가게 앞을 조금 벗어나자마자 호열의 시선은 다시 팔찌로 향했다.

“근데 백호야. 이거 계속 하고 다닐 거야?”

“당연하지. 왜?”

“백호야, 옛날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팬들 많아진 거 알지? 이런 사소한 것도 다 찾아낸다니까. 너랑 나랑 똑같은 팔찌 하고 다닌다고 괜히 말 나오면 어떡해.”

백호는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호열을 안심시켰다.

“이 정도는 해도 돼. 이게 무슨 비싼 커플링도 아니고. 이런 것도 못 하냐? 그리고 국대팀 다른 형들은 여자친구랑 맞춘 반지나 팔찌에 목걸이 다 끼고 다녀도 아무 말도 안 나와. 이런 것까지 조심할 필요 없어. 사람들이 생각보다 관심이 없어. 그리고 농구가 엄청 인기 많은 종목도 아니더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너랑 나랑 소문이라도 나면…….”

“안 나. 괜찮아.”

백호는 말을 자르듯 대답했다. 그러고는 팔찌를 찬 손을 들어 보며 일부러 밝게 웃었다.

“사진이나 찍자. 이리 와 봐.”

스마트폰을 꺼낸 백호가 호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들어왔다. 백호는 장난스럽게 브이를 그렸고, 호열도 백호의 채근을 이기지 못하고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그렸다. 화면 속에는 두 사람의 손목에 감긴 같은 디자인의 팔찌가 빛나고 있었다. 몇 장을 연달아 찍은 백호는 사진을 확인하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나왔다. 이거 페이스북에 올려야지.”

“잠깐만, 이걸 올린다고?”

“어엉, 왜 그르냐?”

“이건 좀……. 그냥 백호 너 혼자 나온 사진 올리는 게 낫지 않아? 내가 아까 너 찍어준 사진 잘 나왔어. 그러니까 그거 올려.”

“왜?”

“우리 둘이 여행 온 거 굳이 알릴 필요는 없잖아.”

백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호열을 바라보았다.

“나랑 너랑 둘이 놀러 온 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걸? 그리고 친구끼리 놀러 오는 게 이상한 거냐? 호열이 니가 괜히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넌 지금 미국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잖아. 그리고 미국은 동성 결혼 허용이라며. 그러면 의심받을 수도 있잖아.”

“미국도 아직 모든 주에서 동성 결혼이 허용된 건 아니야. 뭐, 결혼할 수 있는 주가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남자 둘이 같이 다니면 무조건 커플로 보지도 않아. 안심해도 돼.”

이어지는 반박에 호열은 입을 다물었다. 백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았다. 하지만 한 번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사진 한 장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제가 입을 다물고 있자 백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 화면이 꺼졌다. 백호는 까맣게 변한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깟 소문 좀 나면 어때? 기자들이 너랑 나 사귀는 게 사실이냐고 물으면 그때 아니라고 해도 되잖아.”

“누가 그걸 믿어 준대? 아무도 안 믿을 거고 소문은 계속 따라다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 게이라고 리스트 돌아다닌다고. 네가 원하는 게 우리 사귄다고 소문나는 거야? 그러면 그냥 우리 사귄다고 소문낼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다음에는? 농구를 아무리 잘해도 사람들은 댓글에 그래서 니가 게이인지 아닌지만 궁금해하고 더럽다고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말도 안 되는 루머 계속 퍼지고 그래도 돼? 미국에서 파파라치들 들러붙고 그래도 되냐고. 국가대표 박탈하라고 청원하고 그러면 좋겠어?”

“양호열!”

백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자 호열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때문에 너 욕 먹는 거 싫어. 너 이제 겨우 시작이잖아. 슈퍼 루키라고 상까지 탔잖아.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일로 네가 쌓아 온 걸 망칠 수는 없어. 나는 NBA 슈퍼루키 강백호가 잘하는 농구로만 주목받았으면 좋겠어.”

백호는 이를 악물었다.

“난 농구도 소중하지만, 호열이 너도 소중해. 둘 다 잘하고 싶어. 근데 사귀는 것도 숨겨. 밖에서 손잡는 것도 안 돼. 둘이 찍은 사진도 겨우 어쩌다 한 번이고. 호열이 너 다른 애들이랑 찍은 사진은 잘만 올리잖아. 근데 이제는 고작 이런 팔찌도 안 돼?”

“하아……. 백호야,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대체 뭐가 날 위한 건데? 나는 네가 내 애인이라는 걸 세상에 말도 못 하는데, 그냥 너라도 내 편 들어주면 안 돼? 이런 거도 안하면 난 너한테 뭐야?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야? 난 적어도 이런 팔찌, 이런 사진 정도는 내 맘대로 하고 싶어. 그리고 게이인 거 미국에서는 이제 별 흠도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호열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네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 리가 없잖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너 때문에 얼마나 행복한데. 그런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백호는 한참 동안 호열을 바라보다가 먼저 몸을 돌렸다.

“가자. 들어가자.”

호열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의 손목에서는 조금 전 함께 산 팔찌가 흔들리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방에 들어선 백호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나 먼저 씻을게.”

욕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호열은 한동안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백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백호는 할 수 있는 선에서 그저 평범한 연애를 하고 싶어 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커플 아이템을 맞춰 하고 싶어 했다. 사실 친구끼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사소한 것들조차 허락하지 않고 계속해서 백호와 갈등을 빚고 있다. 백호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정말 백호를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호열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테라스로 나갔다. 여름밤의 바닷바람은 적당히 후텁지근했고,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호열은 난간에 기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인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를 바라보았다. 백호와 금연을 약속한 후로는 한동안 손대지 않았던 담배였다.

사실은 두려웠다. 언젠가 모든 것이 밝혀졌을 때 백호가 받을 상처가 두려웠고, 자신 때문에 녀석이 잃게 될 것들이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걸 잃은 백호가 끝내 자신을 미워하게 될까 봐.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알아차릴까 봐.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호열은 담배를 숨기지 않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며 나온 백호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선 호열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호열이 또 담배 피우네. 너 담배 끊는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호열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 담배 안 끊으려고.”

“뭐?”

“그냥 다시 피우려고.”

돌아선 호열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백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나랑 약속했잖아.”

“응. 그거 안 지키려고.”

“야, 너 지금…….”

“우리 헤어지자.”

백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제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모처럼 기분 좋게 놀러 온 참이었다. 해변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함께 팔찌도 샀다. 물론 싸우기는 했지만 그게 헤어질 일은 아니었지 않나? 자기는 그저 서운한 마음을 털어놓았을 뿐인데. 호열이 조금만 제 마음을 더 알아주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 정도는 연인에게 할 수 있는 투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샤워하고 나왔더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뭐라고?”

“헤어지자고, 백호야.”

백호는 성큼성큼 다가가 호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해?”

호열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백호는 그런 호열을 그대로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테라스 문이 거칠게 닫혔다.

“너 진심이냐?”

“응. 우리 이제 그만하자.”

백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그만해.”

점점 낮게 으르렁거리는 백호의 목소리에 호열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도 사내새끼끼리 붙어먹는 거 그만해야 되지 않겠냐. 언제까지 이래야 되냐. 더럽게.”

순간 백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더러워?”

호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알고 있었다. 백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은 단 한 번도 자신과의 관계를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그런 녀석에게 더럽다니.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

백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말해 봐.”

“헤어지자고.”

“그거 말고.”

“그만 붙어먹자고.”

“그다음.”

호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다음에 뭐라고 했냐고!”

백호의 주먹이 올라왔다. 호열은 한 대 얻어맞을 각오로 눈을 질끈 감았다. 쾅! 요란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했지만, 예상했던 충격은 찾아오지 않았다. 백호는 고개를 숙인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벽을 내리친 주먹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더럽다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랑 사귀는 게 그렇게 더러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백호가 더럽다는 말이 아니었다. 더러운 건 자신이었다. 친구였던 녀석을 마음에 품은 것도, 우정을 배신하고 사랑을 고백한 것도, 그 애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기뻐서 어쩔 줄 몰랐던 것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이었다.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백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 마음을 모른 척했어야 했다. 한순간의 행복에 눈이 멀어 녀석의 미래까지 붙잡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양호열, 너 진짜…….”

제 이름을 부르는 백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호열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백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눈에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 순간 호열의 숨이 턱 막혔다. 백호는 울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백호를 밀어낼 작정이었지만, 정작 녀석이 눈물을 보이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백호는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턱이 달달 떨렸다.

“하.”

“백호야.”

호열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백호의 이름을 불렀지만, 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호열은 이내 고개를 숙이고 연신 주먹만 쥐었다 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더 심한 말을 해서라도 백호를 떼어 내야 한다고, 녀석이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끝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막상 백호가 울고 있으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백호야,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백호는 울음을 삼키려는 듯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호열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백호의 뺨을 감쌌다. 녀석은 고개를 숙였지만, 그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양호열 미워.”

백호는 서럽게 훌쩍였다.

“진짜 미워.”

“응, 알았어. 내가 미안해.”

“헤어지자고 하지 마.”

호열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백호는 호열의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그렇다고 옷깃을 놓지는 않았다. 그저 놓치면 안 된다는 듯 붙잡고 있었다.

“나 너랑 안 헤어져.”

녀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너랑 안 헤어진다고.”

호열은 결국 백호를 끌어안았다. 백호는 고개를 숙여 호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커다란 몸이 품 안에서 조금씩 떨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 위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호열은 동그랗게 옹송그린 녀석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정말로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끝내는 게 맞았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백호는 앞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호열은 끝내 품 안의 백호를 밀어내지 못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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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랑했는데,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헤어지기 싫다고 질질 짤 때는 언제고. 헤어진 지 5년이 넘어서도 습관처럼 호열을 떠올린다. 헤어진 뒤로 호열의 소식은 어디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만들게 했던 SNS에는 새 글이 올라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잘 살고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군단 녀석들은 처음엔 ‘니네는 잘 지내다가 왜 싸워서 이 사달을 내냐’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 앞에서 호열이의 이름조차 꺼내지 않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녀석들이 과도하게 조심하는 게 눈치 없는 저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어떻게 사는지 정도는 말해주지. 차라리 군단 녀석들한테만이라도 우리 관계를 밝혔더라면 조금 편하지 않았을까. 아니, 헤어진 지금은 오히려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린 사랑이었다. 처음이라 서툴고, 어려서 잘 몰랐다. 서툴고 어리다는 말로 치고받고 싸우고, 말로 할퀴며 상처 줬던 일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배우면서도, 서툴게 서로에게 상처 주다가 결국 헤어진 건 아닐까. 그때 호열이는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까?

사람은 왜 항상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흘러간 것의 소중함에 대해, 자신의 미숙함에 대해 깨닫는 것일까.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때, 거짓말처럼 눈앞에 호열이 나타났다. 지난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했던 사람이다. 아직 멀리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백호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갑자기 멈춰 선 거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툭툭 부딪혔지만, 백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쁘게 오가던 인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몸을 피해 양옆으로 갈라졌다.

호열은 제가 있는 줄도 모른 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옆에 있는 남자와는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나누는지 한참 떠들다가 이내 킬킬거리며 웃었다. 웃을 때마다 가늘어지는 눈매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양도 그대로였다. 그 웃는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백호의 입꼬리도 저절로 올라갔다. 저를 보고 웃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잘살고 있구나.

피부는 여전히 희고 깨끗했다. 남자는 관리라더니. 호열은 관리를 잘한 모양이었다. 어쩜 저렇게 변한 게 없을까. 열일곱 살 그때의 얼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또 그렇지만도 않았다. 어느새 얼굴의 선이 제법 굵어져 있었다. 볼의 살이 조금 빠진 건지 턱선도 예전보다 또렷해 보였다. 분명 제가 알던 호열인데, 어딘가 낯선 남자의 얼굴이기도 했다. 호열은 못 본 사이에 제법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수염은 제법 자라려나. 예전에는 면도할 게 별로 없어서 편하다고 웃던 녀석이었다. 20대가 되어서도 술을 사거나 담배를 살 때마다 신분증을 요구받곤 했는데, 이제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몸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화가 없었다. 다른 녀석들은 나이가 드니 살이 붙는다고 투덜거리던데, 호열은 혼자서만 세월을 쏙 비껴간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몸이 더 탄탄해진 것 같기도 했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모양이었다.

한때는 누구보다 호열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호열이가 어떤 일을 하며, 무엇을 먹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오래 함께했는데, 고작 5년을 보지 못했다고 모르는 것이 이렇게 많아졌다. 괜한 서러움에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강백호는 마지막 우승컵을 들어 올리던 날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길이 이상할 만큼 한산했다. 평일 오후라고 해도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인데, 이상하게 제 앞쪽으로만 탁 트여 있었다. 뭐라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이 이상하다. 꼭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급기야는 뒤까지 돌아봤지만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앞을 바라본 순간,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양호열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얼굴. 강백호의 얼굴이었다.

백호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 바보같이 해맑은 얼굴을 본 순간 호열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호열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마치 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백호에게로.

 

점점 더 가까워져 간다.

 

10미터, 7미터, 5미터, 3미터, 그리고.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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