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 of 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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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아즈
@azazelNJ
여자친구 - 해야
서른, 계란 한 판을 채운 나이에 양호열은 사랑을 자각했다. 물론 여전히 이 것을 사랑이라 말하기 의문스럽다. 하지만 지금 이 느낌을 사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매년 같이 백호의 경기를 보러 미국에 왔던 어느 날, 캘리포니아의 하늘이 새파란 만큼 농구 코트 위의 백호가 새빨갛게 빛났다.
그래서 제 마음도 새빨개진걸까. 어릴 적부터 호열이 백호를 바라보는 마음은 복잡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신기함과 즐거움이 섞인 호감이었고, 백호가 상실을 겪었을 때는 애도와 걱정이 겹쳐진 책임감이 함께 있었다. 농구를 시작할 때는 뿌듯함이 더해지고, 부상을 입었을 때는 희망을 위한 의지를 넣었다.
그렇게 온갖 색의 감정들이 섞이니 호열은 그 전까지 제 마음이 새까만줄 알았다. 검정은 모든 색을 덮어버리니 그가 백호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백호군단이나 남들이 왜 백호에게 그 정도까지 해주냐 물을 때 할 수 있는 답은 '하고 싶으니까.' 에 그쳤던 것이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핏자국도 햇빛을 받으면 붉은 색인 것을 알 수 있듯이, 그 옛날의 체육관에서처럼 백호가 미국에서 다시 세상의 모든 빛을 얻었을 때 호열은 백호를 향한 제 마음이 붉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마음을 찾았다.
이제 무슨 일이 더 일어날까. 호열은 궁금해졌다. 이제까지 호열은 태양 같이 빛나는 백호를 보며 그 옆에 있을 다짐을 했고, 찬란한 백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싶어 불확실한 미래를 살았다. 말하자면 백호는 제 삶의 이정표이자 갈 길을 알려주는 북두칠성이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사랑인 것을 알게 된 지금, 호열은 백호의 옆에 서고싶어졌다. 백호가 제 옆에 서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백호는 언제나 호열에게서 멀어지기만 했다. 농구를 시작했을 때 호열은 백호의 등을 보았고, 미국으로 출발 했을 때 호열은 백호가 작아지는 모습을 한없이 지켜보았다.
이번에도 백호가 나와 멀어지는 것을 봐야할지도 모르지. 소년 시절에는 잃을 것이 없어 무작정 뛰어들었다지만, 세상의 말이 그렇듯 나이를 먹을 수록 잃을 것이 많아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돈을 많이 벌면 그만큼 할 수 있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할 수 없는 것만 잔뜩 늘어났다. 백호의 모든 경기에 따라가는 것 같이.
직장인으로서 며칠이 되지 않는 연휴를 미국에서 보내고, 백호와 일상을 나누며 단 한 번의 경기를 응원하고, 양호열은 다짐했다. 기다릴 것이다. 백호가 모든 것을 결정할 때까지. 자신이 백호를 위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다. 태양 아래 타들어가는 심장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 무언가로 백호가 계속 빛날 수만 있다면.
“백호야, 다음 시즌에도 보러올게.”
“당연하지! 호열이 네가 있어야 이 천재가 멋지게 활약할 수 있단 말이야.”
“하핫. 그래서 너를 정말 좋아해. 나 이제 가볼게. 사랑해, 백호야.”
호열은 그대로 비행기 수속 창구로 들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백호가 호열을 붙잡으려 했으나, 호열은 이미 경계선을 넘어간 상황이었다. 백호는 방금 들은 말을 다시 머리 속에 새겼다. 나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호열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말은 있어도 자신에게 말하는 말에 있어 빈말은 없었다.
그러므로 저 말은 호열의 진심이다. 하필 이 타이밍인 이유는 답을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겠지. 과거의 호열은 괜찮은 것이 너무 많았다. 호열의 간식을 백호가 뺏어 먹어도, 백호 대신에 근신 처분을 받아도, 새벽에 몇 번이고 전화가 걸려도 호열은 전부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호열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정말 괜찮냐. 백호는 제 기억 속의 호열에게 묻고싶어졌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의문도 대답도 늘어났다.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는지, 왜 이제서야 고백하는건지, 다음 시즌에 정말 올 것인지. 나는 네가 있어 즐거웠고, 네가 없어 외로웠는데. 이것도 사랑인 것 같아, 호열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인생을 살며 두 사람은 서로를 생각했다. 전화 너머로 일상을 평소처럼 이야기 하면서도 좋아한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얼굴 보지 않고 음성으로만 전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말이라, 서로가 입 밖으로 말을 꺼내려다 주저하고 이야기를 돌리며 숨을 삼켰다.
시즌이 가까워질수록 백호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미국으로 넘어와 호열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 처음 몇 년과 비슷한 상황인 것만 같았다. 아니, 그 때는 거리가 떨어져있어도 제가 돌아가면 호열이 반겨줄 것이라는 기대와 안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호열이 미국으로 올 다음 시즌까지 마치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강백호는 안다. 이 어둠 속을 벗어나는 것이 호열이 바라는 일이라는 사실을. 나이를 먹어 이성을 가지고 날카로워진 백호는 호열의 말에서 그가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어디론가 숨어버린다면 호열은 백호를 위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이다.
'역시 천재라니까, 백호는.'
호열은 평범한 회사원처럼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며 오늘도 백호 생각을 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백호의 변화는 알아챌 수 있기에, 매일 달라지는 백호의 변화가 즐거웠다. 백호는 결국 어떤 결정을 할까. 백호가 시즌의 시작을 기다리는 만큼 호열도 애가 탔다.
언제 백호의 결정을 맞닥뜨리게 될까. 공항에서 바로? 아니면 모든 경기가 끝나고? 어느 때이든 호열은 백호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수락이든 거절이든 다른 결정이든, 백호가 원하는 대로 제 위치가 결정되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물어볼 수도 있을 테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것이 궁금해져 호열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 같은 심정으로 시간을 보냈다. 백호와 대화하다보면 숨을 참기 어렵듯이 사랑한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산타의 존재를 찾으면서 찾지 않는 초등학생처럼 모르는 척 버텼다.
시즌이 점점 가까워지자, 호열은 큰 맘 먹고 열흘의 연휴를 비웠다. 물론 백호에게 말하지 않았다. 도리어 시즌의 마지막 경기에 보러갈테니 데리러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나 했다. 그러면 결승전 날에 와야겠다며 자신감을 뽐내는 백호의 말을 들으며 웃었다. 백호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경기를 지켜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홀로 도착한 미국은 쌀쌀했다. 아니, 사실 날씨는 따뜻했지만 호열의 마음이 사무쳤는지도 모른다. 출장으로 왔을 때는 별 생각 없이 숙소로 향하며 미국은 넓으니 여기에 와도 백호는 못 보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백호를 볼 수 있는 공간이며 백호가 마중 나오지 않은 공항이라니 너무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첫 날은 일부러 경기가 없는 날로 잡았다. 백호가 연습 중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했으므로, 호열은 태연하게 백호의 집 주변 시내를 구경했다. 몇 번이고 백호와 함께 간 가게들이었고, 모두가 자신을 백호의 사람으로 알아보았다. 백호가 없어도 백호의 햇빛이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받는 기분이었다.
둘쨋날은 경기장에 들어가지 않은 채 계단의 벽을 방패 삼아 백호의 경기를 지켜봤다. 응원석도 관계자석도 아닌 동떨어진 공간에서 백호를 바라보는 느낌이란. 오히려 어릴 적 체육관 이층에서 지켜보던 시선과 비슷하여 웃음이 나기도 했다. 백호가 자신을 알아챌 것 같으면 벽에 숨으니 장난치는 기분마저 들었다.
셋째날과 넷째날도 경기의 연속이었다. 그동안 백호가 이렇게 고단한 일정을 거쳤구나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멀리서 보는 자신도 시간을 거듭할수록 지치는데, 치열한 경기를 몇 시간 동안 반복하는 백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농구공을 붙잡고 제일 높은 곳에서 리바운드를 해내며 찬란히 빛나는 백호가 자랑스러웠다.
다섯째 날에는 경기가 있었지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바다였다. 백호가 있는 곳이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울 수 있었지만 제 의지로 다른 곳에 향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그 전에는 사랑인지 몰랐으니 의지가 아닌 마음이었다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호열이 바다에 온 이유 또한 백호에게 있었다.
백호가 미국에 갔을 때 초반 몇 년 동안, 그는 향수병을 겪으며 호열에게 매일 전화를 걸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호열을 안심하게 했던 것 같다. 호열이 백호에게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지만 그 때의 호열은 백호가 진심으로 걱정되어 말했다. 바다에 가보라고.
호열이 매일 바다에 갈 테니 백호 네가 바다에 온다면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겠냐. 그 말을 들은 백호가 호탕하게 소리치며 하루라도 안 오면 안 된다고 당당하게 요구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실제로 호열은 그 날부터 매일 바다에 향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다에 갔다가, 감기에 걸려 백호에게 혼난 다음에는 날이 좋을 때 갔다.
백호가 얼마나 바다에 갔을 지는 알 수 없었다.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이런 부분에서 백호는 자상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아주 못 버틸 때쯤 오늘 바다에 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그 안 쪽에 숨긴 말도 많았다. 그래서 호열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이 바다에서 보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새빨간 백호를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이 바다에 외로움을 밀려 보냈을지, 얼만큼의 슬픔을 이 바다에 녹여냈을지. 어제 들었던 백호의 외침과 관중석의 환호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백호야, 너는 이 바다에서 떠올랐구나. 호열은 하루 종일 그 바다에 앉아 있었다.
“백호야!”
“호열아?! 너, 너 거기 경기 끝날 때까지 있어야 한다!”
여섯째날의 호열은 관중석에 앉았다. 백호의 이름을 가장 크게 외치니 이름의 주인인 백호가 호열을 돌아봤다. 제가 온 것을 정말 몰랐는지 호열을 가리키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지, 라며 답하니 백호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저 미소를 보고싶어서 호열은 지금까지 백호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이 날의 백호는 누구보다 멋지게 활약했다. 마치 농구공이 그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는 것처럼 백호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호열은 목이 터지도록 백호의 이름을 불렀고 백호는 그를 향한 부름에 화답했다. 모든 관중이 백호를 연호하고 그 소리의 크기만큼 빠른 속도로 백호는 코트를 질주했다.
당연하게도 그 경기는 우승했다. 백호가 관중석 펜스를 넘어 호열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호열이 백호의 가족과 다름 없음을 알고 있는 팀원들이 백호를 놓아주었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서로를 만난 것처럼 끌어안았다. 한참을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지금의 자세를 눈치채고 두 사람이 떨어졌다.
“호열아, 대체 언제 왔냐? 너 설마 며칠 전에도?”
“아아, 그걸 눈치챘었어? 역시 천재네.”
“뭐, 진짜로?! 내가 보고싶어서 착각한건줄 알았는데!”
“저기 계단 쪽에서 보고있긴 했지만...”
“미리 말하지! 가족 자리 있는데!”
“그 곳에서 백호 너를 보고있으니까, 예전 체육관 이층에서 보는 느낌이 나더라.”
호열의 말이 끝나고 정적이 이어졌다. 백호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그야 백호가 그 시절 올려다본 호열은 백호를 놀리며 즐겁게 웃었던 모습이었다. 어떤 느낌이 비슷한지 몰라 백호가 의문에 차있는 것을 보고 호열이 미소지었다.
“이제 내일 결승이지? 기대할게.”
“응, 당연하지!”
다짐을 끝으로 백호는 그의 팀으로, 호열은 바깥으로 향했다. 제자리로 돌아간 두 사람이 내일을 기약했다는 사실을 서로가 알았다. 백호는 우승을 위한 의지를 가지고, 호열은 백호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했다. 너무나 긴 하루였다.
그렇게 도착한 마지막 일곱째날, 모든 농구팀이 바라던 결승이 코트에서 펼쳐졌다. 백호는 지금까지 노력한 최선을 쏟아냈다. 호열은 목이 터져라 백호를 응원했다. 여기에 명확한 사실이 있다. 바로 호열이 있는 한 백호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천재라는 것.
엎치락 뒷치락 하는 접전이 이어지는 채 전반전을 넘기고, 후반전이 되자 모두가 불타올랐다. 별들이 빛나는 이 순간 호열의 눈에는 백호가 가장 찬란했다. 그러니 백호는 이겨야 했다. 시합의 끝이 다가오고 마지막, 버저비터가 울렸다. 백호의 몫이었다.
환호성이 울려퍼지고 모두가 백호의 이름을 외쳤다. 그 안에는 당연히 호열도 있었다. 시상식이 이어지고 MVP가 백호로 지정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백호는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저를 응원해주시고 사랑해주신 분들 감사드리고...”
진심이 담긴 감사가 한참 이어지고 끝이 도래했을 때 백호가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호열아, 사랑한다!”
호열에게 있어 가장 찬란한 태양이 이뤄낸 최고의 결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