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이미지를 누르시면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흑백 - 달담.jpg

빨강은 사랑

평범

@Commonness_HADA

달담 - 흑백

바람을 타고 종이들이 날라 옵니다. 이 먼 북쪽 끝까지 오느라 종이는 아주 너덜거렸으나, 그 위에 적힌 글자들은 아직 선명히 그려져 있습니다. 다만 우리 마을에는 글을 모르는 이들이 많았기에 종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촌장님께 가져갔고, 그제야 종이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

 

종전 선언이 적힌 종이었습니다.

참으로 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이 난 이유도 모른 채 젊다고 하면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사선으로 끌려갔고, 소식이 끊겼습니다.

18년 동안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빼앗은 전쟁의 끝이 왕의 인장이 찍혀있는 그 종이 한 장으로 공표가 된 것이었죠. 이렇게 간단하게. 허무하다면 허무했으나 넋을 놓고 있기에는 현실이 막막했습니다. 이 마을은 노인과 아이들뿐이었으니까요. 아, 아니다. 딱 한 명 있습니다. 우리 아빠요.

 

“아빠?”

 

내 이야기를 듣던 이방인의 표정이 구겨졌습니다.

 

“너희 아빠 이름이 뭐야?”

“그건 왜요?”

 

이 이방인은 너무나 수상합니다. 뒤집어쓴 모자 아래로 나와 같은 빨간색 머리카락이 보여 혹시 전쟁 때 끌려갔다던 나의 친아버지일까 했지만, 역시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방인이 마을 입구에 들어왔을 때 마물인 줄 알고 아이들이 울면서 도망갈 정도였으니까요. 아이들이 울면서 도망가니까 갑자기 잔뜩 움츠리면서 주섬주섬 주머니를 꺼내던 모습은 의외였지만.

 

“아마도 이 천재의 감이 맞다면.”

 

내 경계에 이방인은 품을 뒤져 다시 그 주머니를 꺼냈습니다.

나는 이제 저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압니다.

커다란 손에 잡힌 알록달록한 구체. 이방인의 말로는 알사탕이라고 하는데 오늘 처음 먹어보았습니다. 주변에 몰려있던 아이들도 눈을 반짝이며 손을 내밉니다.

 

“네 아버지 이름 말이야.”

 

이방인은 아이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나눠주며 나를 바라봅니다. 푹 눌러쓴 모자 때문에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드러난 입꼬리는 자신감 있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요헤이. 맞지?”

“어떻게 알았어요?”

“…너 정말 요헤의 딸이야?”

 

요헤, 결혼했어?

왜인지 이방인의 말끝이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것 같습니다.

 

“…….”

 

머뭇거리던 나는 대답 없이 손을 주머니 속에 쑥 넣어 알사탕 두 알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 달립니다. 뒤에서 뭐라 외치는 고함이 들리지만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빠를 찾는 외지인이라니.

중앙에서 온 아빠를 다시 데리러 온 사람일지도 몰라요. 귀한 인력이니까요.

항상 아빠는 이제 은퇴한 퇴물이라며 웃으시지만. 그래도 또 모르잖아요. 여전히 우리 아빠의 검술은 마을에서 제일 빠르고 강합니다.

아빠 덕분에 우리 마을이 마물의 습격으로부터 버틸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 마을은 땅의 맨 북쪽에 있습니다. 마물들을 지키던 성벽의 경비대도, 마을의 단 한 명뿐이었던 의사 선생님도 전쟁터로 모두 끌려갔습니다. 아이들을 지킬 이들은 아픈 어른들과 노인뿐이었죠. 아이들이 마물에 잡아먹히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을 노인분들도 한평생을 마을 지키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검과 활을 쥔 노인들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을 움직이며 마을을 지켰습니다. 전투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아픈 어른들은 아이들을 돌봤죠.

그러다가 촌장님의 말씀으론 이제 정말 다 죽겠구나 싶었을 때 아빠가 이 마을에 왔다고 합니다. 아빠가 도착하자마자 검을 휘둘러 마물들을 토벌했고, 마을의 상황을 살핀 뒤 마을 밖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마물은 보통 해가 질 때쯤 나오기에 대체로 아빠는 낮에는 주무셨고, 밤에 불을 크게 피우고 보초를 섰죠.

나는 그때쯤 태어났는데, 나의 친부모님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군병들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픈 어른들까지 모두 끌려가고.

빈집에서 울리는 울음소리에 몰려든 마물들을 퇴치하던 아빠가 절 발견하셨다고 해요.

맞아요, 아빠와 나는 피로 이어져 있지 않아요.

외관만 봐도 알아요. 아빠는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까맣고 녹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나는 마을 강가의 진흙처럼 탁한 붉은색입니다. 게다가 곱슬이 심해 비만 오면 머리카락이 잔뜩 부풀어 올라요. 아빠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정말 귀엽다며 웃었지만, 난 싫습니다.

나도 아빠를 닮아 생머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밤하늘같이 까만 머리칼이었으면.

집으로 돌아가니 아빠가 집 앞마당에서 검을 갈고 계셨습니다.

낮에 좀 주무셔야 밤에 보초 서실 때 편하실 텐데. 검날을 살피느라 아직 잠에 들지 못하셨나 봐요, 아빠의 눈 밑은 언제나 새카맣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요. 언젠가 마물이 모두 사라져 아빠가 편하게 밤에 잠을 주무실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빠가 이곳을 떠나 다시 중앙으로 돌아가시면, 밤에 푹 주무실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발걸음이 절로 느려집니다. 아빠가 이곳을 떠나면 나는 어떡하죠.

 

“미오, 왔니?”

 

가까이 가니 아빠가 손질 중인 검을 내려놓고 저를 안아주십니다.

 

“저 왔어요! 이것 좀 드셔보세요!”

 

주먹 쥔 손을 펴니 땀에 젖어 끈적이는 사탕이 드러났습니다. 앗. 조금, 더러울까 싶어 망설였는데 아빠는 웃으며 한 알은 내 입속에, 한 알은 자신의 입속으로 쏙 넣습니다. 표면이 땀에 젖어 잠깐 짠맛이 났다가 금세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집니다. 아빠는 내 끈적인 손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시며 묻습니다.

 

“사탕은 어디서 났어? 귀한 건데.”

 

사탕을 머금은 아빠의 볼이 볼록하게 올라왔습니다. 달콤함에 기분이 좋아지신 것 같아 역시 가져오길 잘했습니다.

뭐어, 거의 뺏어온 것이지만. 이방인의 주머니에는 사탕이 그득했으니, 상관없겠죠.

 

“어, 음. 마을에 갔는데 누가 줬어요.”

“으응? 누가?”

 

그제야 나는 사탕에 홀려 이방인에게 신나게 떠들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아빠의 이름을 알고 있던 그 이방인. 탁한 붉은색인 내 머리칼과는 다르게 바람결에 푹 눌러쓴 모자가 팔랑이며 드러난, 불꽃같던 머리칼의 그 이방인은 누구일까요.

 

“…모르겠어요.”

 

아빠의 표정이 변합니다. 종전이 되었다고 해도 전쟁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기에 이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을 반기지 않습니다.

 

“마을에 외지인이 왔구나.”

“네에.”

“군병들이었니?”

“아니요, 그냥 떠돌이 같았어요.”

 

아빠는 잠시 말이 없으시다가 금세 미소를 지으시며 나를 안아주셨습니다.

 

“그렇구나. 손님이 오셨나 보네. 하긴 요즘은 종종 상인들도 여기 들리니까.”

 

순간. 그 떠돌이 외지인이 아빠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걸 안다면 아빠가 멀리멀리 가버리실 것 같았어요.

다행히 아빠는 더 묻지 않으시고 날이 잘 세워진 검을 정리 후 잠을 주무시러 침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빠는 아빠의 일이 있고, 나는 나의 일이 있죠. 나는 이제 15살입니다.

아빠가 주무시러 들어가신 동안 혼자 충분히 집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단 말입니다. 오늘은 햇살이 좋으니, 아빠의 옷들을 꺼내어 밖에 널어놔야겠습니다. 햇빛 냄새는 언제나 기분을 좋게 하니까요.

아빠의 옷들을 꺼내어 빨랫줄에 널기를 반복합니다. 햇빛이 매우 좋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빠의 모든 옷을 꺼내기로 했습니다.

몇 없는 옷들이 금세 햇빛에 꺼내어지고, 옷장이 텅 비어갈 때쯤 옷들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낯선 것을 발견했습니다. 옷장 맨 아래 서랍, 그것도 제일 안쪽에서 곱게 개어있는 천입니다. 침대 시트인가 싶었지만 펼쳐보니 그것은 망토였습니다.

펼치자마자 낯선 향을 맡았습니다. 장롱 속 묵은내와 함께 이건, 무언가의 탄내. 그리고 꽃향기? 냄새가 마구 섞여 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빛바랜 붉은 망토의 정면에는 아주 얇은 금실로 섬세히 자수가 놓인 꽃무늬가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실의 표면이 반짝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처음 보는 망토입니다. 아빠의 옷일까요?

옷을 모르는 제가 봐도 이 천, 고급품입니다. 엄청 부드러워요.

아빠는 왜 이 망토를 이렇게 깊이깊이 넣어두셨을까요?

이리저리 망토를 살피다가 등쪽 부분으로 길게 실로 꿰맨 자국을 발견합니다. 그 꿰맨 부분 주변으로 무언가 얼룩덜룩 묻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내 옷소매 끝으로 문질러도 오래된 얼룩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빠는 이 멋진 망토를 엄청 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아끼고, 아껴 입다가 망토가 찢어지고 이런 얼룩이 묻었고, 지워지지 않아, 버릴 수도 없으니 꿰맨 후에 이 옷장에 넣어 둔 것이겠죠!

이 망토를 깨끗하게 빨아서 보여드리면 엄청나게 기뻐하실 거예요!

마을 잡화상 할아버지께 가져가서 방법을 알려달라고 해야겠습니다.

나는 망토를 품에 안고 집 밖으로 조심히 나왔습니다. 본래 기척에 예민한 아빠는 꽤 깊게 잠드셨는지 조용해요.

지금입니다. 나는 다시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잡화상 할아버지는 일찍 문을 닫으셔서 빨리 가야 합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품에 커다란 포대가 안겨 있습니다. 아직 봄은 아닌지라 비료 포대는 아니고, 흙이나 돌이 담긴 포대라고 하기엔 지금 공사 중인 구역은 없습니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유우가 나를 부릅니다.

 

“야아─! 미오! 어디가?”

“안녕! 잡화상 가는 중이야!”

“아 그래? 참! 너도 받았지?”

“뭘?”

“보급품 말이야!”

“보급품?”

“못 받았어? 얼른 챙겨! 아까 그 곰 같은 외지인이 촌장님하고 이야기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중앙에서 온 보급품 나눠주더라고! 씨앗이랑 건조식량에다가 소금, 후추까지 있어!”

“진짜?!”

 

소금, 후추는 엄청 귀한 건데. 설마 아까 사탕 뺏었다고 보급품을 안 준다고 하진 않겠죠. 돌아가는 길에 촌장님 댁에 가서 보급품을 받아와야겠습니다. 치사하게 나온다면 사탕처럼 보급품도 몰래 가져가면 되겠죠.

나는 유우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잡화상으로 들어왔습니다.

잡화상은 한낮인데도 빛도 들어오지 않을 만큼 가게는 수많은 물건이 가득 쌓여있습니다. 어두운 가게에는 중간중간 긴 유리통에 담긴 밀랍 초가 은은히 빛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이놈아.”

 

물건의 무덤에서 타타 할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밀랍 초가 담긴 유리병을 할아버지 앞에 끌어 놓고 아빠의 망토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오염된 부분을 할아버지의 눈앞에 들이밀었습니다. 타타 할아버지는 눈이 좋지 않아 이렇게 해야 보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거! 이 얼룩 어떻게 지워요?”

“뭐가 묻은 건데?”

“그건 몰라요.”

 

할아버지의 주름이 더욱 짙어진다.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지우겠다는 게야?”

“할아버지가 파는 물건 중에 얼룩을 지울 수 있는 거 없어요?”

“이게 뭔지 알아야 꺼내든지 말든지 하지, 원.”

 

타타 할아버지는 바로 눈앞에 망토의 얼룩을 가까이 보시다가 그 굳은살 박인 손끝으로 실로 꿰맨 부분을 살살 쓸어 보기도 하고 코를 박고 냄새를 맡으십니다. 그리곤 물건들로 이루어진 산으로 들어가시더니 무언가를 찾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인내심이 바닥나 할아버지를 찾으러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할 때쯤, 불투명한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손에 들고 오셨습니다.

 

“찬물에 오래 담가뒀다가 이 액을 얼룩에 부어. 그리고 손으로 조물조물 문질러봐라. 반나절 정도 뒀다가 다시 찬물에 헹구면 아마 지워질 게다.”

“감사합니다! 얼마에요?”

“끌끌끌, 누가 미토 딸내미 아니랄까 봐. 나중에 내가 느이 아버지한테 부탁할 때 꼭 들어다오.”

 

곤란합니다. 평소라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이건.

 

“안 돼요! 제가 손님이잖아요! 저한테 말씀하세요!”

“아이고, 맹랑한 꼬맹이. 알겠다, 알겠어. …그래, 우리 화공(畫工)님께서 이 할애비 좀 그려 줄 텐가? 아야의 집에 걸어야 해서 말이야.”

 

초상화 부탁입니다.

나는 마을에서 제법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어른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 아빠를 그려드렸는데, 아빠가 마을을 돌며 자랑한 이후로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본인들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림을 그려 드리면 정말 좋아하셨고 나도 기뻐하는 분들을 보며 기분이 좋았습니다. 작게나마 용돈도 받았고요.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마을 촌장님 댁 벽 한쪽에 내가 그린 초상화가 걸릴 때마다 기분이 울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그림이 영정(影幀)이 되어 버렸어.’

 

한동안 붓을 잡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결국 다시 붓을 잡은 이유도 할머니 할아버지들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붓을 놓으면 이분들을 잊는다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거든요.

그럼에도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 아빠가 사람 말고 다른 것들도 그려보라고 해주셔서 요즘엔 시간이 나면 마을의 풍경이나 주민들의 일상도 그리고 있습니다.

분명 타타 할아버지도 자신의 영정을 그려달라는 말씀이겠죠. 나는 웃으며 후일로 조금 미룹니다.

 

“할아버지 아직 건강하시니까 나중에 그려 드릴게요.”

“으잉? 너는 내가 천년만년 살 줄 아느냐?”

“지금은 그럴 것 같아요.”

“어이쿠 참 나! 네 세 치 혀를 이길 수가 없구나!”

 

타타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물건들 아래로 푹 파묻히더니 한참 있다가 나에게 묵직한 나무 상자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럼, 이걸 아야한테 전해주렴. 이건 가능하지?”

 

그러고 보니 타타 할아버지와 촌장님은 오랜 소꿉친구라고 들었습니다. 친근한 부름에 나는 되물었습니다. 확실하게 해야 하니까요.

 

“아야하 촌장님께요?”

“그려. 전에 부탁했던 물건이라고 하면 알 게다.”

 

이 정도는 쉽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의 망토를 돌돌 말아 다시 내 어깨에 둘러 묶었습니다. 그리고 타타 할아버지가 주신 상자를 양손에 조심히 들고 잡화상을 나왔습니다.

촌장님의 집은 우리 집과 가깝습니다. 마을의 외곽 쪽입니다. 촌장님께 상자를 배달하고, 보급품을 챙겨 집에 돌아가서 이 망토를 빨아서 널면 아빠가 일어나실 시간에 딱 맞게 건조될 것 같습니다. 나는 발걸음을 서두릅니다.

 

“촌장님!”

 

도착한 촌장님의 문을 두드리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보급품은 어디 있지? 밖에 없는 것을 보니 아마 촌장님 댁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을이 가족 같은 사이라지만 그래도 촌장님 댁에 함부로 문을 열 순 없기에 나는 다시 쥔 주먹에 힘을 줍니다.

 

“아야하 촌장님!”

 

쿵! 쿵! 울리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서 있습니다. 촌장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대합니다. 어?

 

“아까 그 사탕 도둑이잖아?”

 

이방인.

모자를 벗어 드러난 이방인의 얼굴은 너무나 험상궂습니다.

 

“미오?”

 

이방인의 뒤로 촌장님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설마 촌장님이 보는 앞에서 해코지하겠나 싶어 나는 흥! 콧방귀를 뀌며 이방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이방인은 엄살을 피우며 옆으로 밀려가다가 갑작스럽게 뒤에서 아빠의 망토를 콱 붙잡았습니다.

 

“사쿠라기 씨! 미오!”

 

뒤돌아본 내 시선과 이방인의 시선이 맞닿았습니다.

 

“…….”

 

이 이방인,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무례하고, 거침없고.

이방인은 아빠의 망토를 붙잡은 자기 손목 아래에 서늘히 닿아있는 칼을 보고도 시큰둥합니다.

 

“이 망토 네 거야?”

“아빠 거예요.”

“…아닐 텐데.”

“놔요.”

 

아빠가 항상 그러셨죠.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녀석들은 일단 칼을 들이밀라고. 북쪽의 아이들은 장난감 대신 칼과 활을 가지고 놉니다.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만. 사쿠라기 씨. 손 놓으세요. 미오, 너도 칼 집어넣으렴.”

 

촌장님의 중재에 이방인은 망토를 쥔 손을 놓습니다. 잡은 손이 멀어지자 나도 칼을 거두었습니다. 짜증 납니다. 나는 잠시 이방인을 노려보다가 촌장님께 상자를 건네주었습니다.

 

“타타 할아버지께서 촌장님이 부탁하신 물건이라고 하셨어요.”

“세상에. 일 년 전에 부탁한 건데 지금 왔다고? 더 늦었다면 내 무덤 비 위에 놓았겠구나. 전해줘서 고맙다.”

“촌장님, 보급품 가져가도 돼요?”

“그래, 안 그래도 너희가 이제 마지막이야. 들고 갈 수 있겠니?”

“당연하죠.”

 

촌장님이 주신 묵직한 보급품을 품에 안고 나가려는데 이방인이 다시 내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 망토, 잠깐만 줘 봐.”

 

끈질긴 것으로는 소의 힘줄보다 더 끈질긴 이방인입니다.

 

“왜요?”

“…무늬 하나만 확인할게. 혹시 꽃무늬가 수놓아있지 않아? 금실로 말이야.”

 

금실로 반짝이는 꽃무늬.

어떻게 이 이방인이 그걸 안 걸까? 아빠를 안다는 말이 진짜였다고? 진짜였다고 해도, 그걸 내가 알려줄 필요가 있나? 이 이방인이 아빠를 데려가면 어떡해?

 

“…싫어요.”

 

나는 그에게 힘껏 부딪친 후, 비틀거리는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얼른 집으로 가서 아빠의 망토 얼룩을 지우고, 칭찬받고 싶었습니다. 어서. 어서 아빠에게.

 

“이 발 빠른 꼬맹이.”

 

목뒤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입니다.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립니다. 나는 뒤도 못 돌아보고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옮겼습니다. 보급품 때문에 속도를 내기 힘들어 맘껏 달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안 놓친다.”

 

커다란 양손이 내 허리를 강하게 붙잡습니다. 느껴지는 압박감에 기침을 토했는데 시선의 높이가 훅 달라집니다.

이 무식한 이방인. 나를 그대로 잡아 들어 올렸습니다.

 

“놔요!”

“너 정말 요헤 딸 맞아?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이이익!”

 

발을 휘둘러 어디든 닿는 부위를 걷어찹니다. 두 팔은 보급품을 끌어안고 있어서 이게 내 최대의 반항입니다. 이방인은 별로 타격이 없는지 나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채 이걸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놓으라는 내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고.

가슴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열이 올라 뜨끈해집니다. 발길질해도 멀리 손을 들어 올린 터라 이방인의 몸에 닿지도 않습니다.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들어. 화가 나.

나는 옛날부터 화가 나면 눈물부터 나오는 터라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려 했습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며 화를 가라앉게 하면 된다는 아빠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내 즐거운 추억은 모두 아빠와 함께인데, 아빠가 저 이방인과 돌아가면 나는 이제 어쩌란 말이야.

 

‘미오.’

 

울면 지는 거야! 울면 안 돼! 내 마음과 달리 정신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다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던 아빠를 떠올렸습니다.

 

‘만약 즐거운 추억을 떠올려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땐 그냥 울어도 된단다.’

 

아빠는 웃으며 손질하던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말씀하셨죠.

 

‘미오가 우는 소리는 백 리 밖에서도 들리니까. 미오가 울면 아빠가 달려갈게.’

‘달려오시면요?’

‘응? 당연히 우리 딸을 꽉 안아줘야지.’

 

그래서 지금 곤히 주무신 아빠를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계치를 넘어간 분노에 울음은 터져버렸고 다물고 있던 입술이 벌어져, 그대로 내 입 밖으로 울음이 터져 나와버렸습니다.

 

“아아아아아아!”

 

알아요. 사실 울음이라기보단 고함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거예요.

갑작스러운 내 울음에 이방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에? 으어? 우, 울어?”

“아빠아아아! 아아아아아!”

“어? 왜, 아니, 잠깐만. 야야야.”

 

이방인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아주 멀리서 무언가 쾅─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면에 겨우 닿아진 나의 두 발과 눈물막이 쳐져 울렁거리는 시야에서도 멀리서 빠르게 달려오는 형상이 보여서.

반가움과 기세까지 등등해져 이방인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

 

그는.

그의 표정은. 결코 내가 예상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무어라 묻기도 전에, 빠르게 달려온 아빠가 그대로 높게 도약하여 이방인에게 검을 내리꽂습니다. 팔 하나를 자를 생각으로 내리꽂은 검날과 그사이 뽑은 이방인의 검날이 허공에 부딪혀 불꽃을 튕깁니다. 휘두르는 아빠의 검을 버틴 마물은 없습니다. 격이 높고 지능을 가진 마물의 귀족쯤 되어야 아빠의 검격을 막았는데.

나를 본인의 뒤로 숨기고 아빠는 금세 몸을 낮추고 검을 크게 휘둘러 이방인의 빈 옆구리를 베어버리려는 순간.

 

“요헤이!”

 

이방인의 외침에 아빠는 순식간에 손목을 틀어 칼날이 아닌 칼등으로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습니다. 멍은 들었겠지만, 적어도 베이진 않았을 겁니다. 크게 울린 타격음에도 이방인은 고통스럽지도 않은지 자신의 검을 던지고 아빠의 뺨을 잡습니다.

 

“역시 너구나!”

 

아빠의 검까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하나미치?”

 

저는 그런 아빠의 표정을 처음 보았습니다.

한참 이방인을 바라보던 아빠는 땅에 떨어진 자신의 검과 이방인의 옆구리를 바라봅니다. 어딘가 아빠의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에 불안해진 나는 다급히 아빠의 소매깃을 잡았습니다.

 

“아빠?”

 

빠르게 아빠의 표정이 정리됩니다. 금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는 그 손끝은 긴장하셨는지 서늘합니다.

 

“미오, 괜찮니?”

“네에. 아빠, 깨워서 죄송해요.”

“야, 요헤. 너 결혼했어?”

 

그는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립니다. 나도 인상을 찌푸립니다. 서로 말없이 바라만 볼 때.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요란한 소란으로 집에서 나오신 아야하 촌장님의 물음에 일단 이 대치가 끝이 나게 됩니다.

 

 

​

​

​

​

​

─

 

 

​

​

​

​

​

미토 요헤이는 식탁 너머로 마주 앉은 딸과 오랜 친우를 바라보았다. 피로 해소에 좋다며 미오가 끓인 차는 매우 새콤달콤해서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그러니까.

 

“각 마을에 보급품을 나눠주며 현지 상황을 조사하고 있다가 흘러 흘러 우리 마을에까지 도착했는데 내 딸을 만났고.”

 

하나미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오는 하나미치가 나를 데려갈까 봐 예의 없게 행동했고.”

 

요헤이의 말에 미오는 화들짝 놀라 말을 덧붙였다.

 

“아니에요! 그냥 사탕만 가져온 것뿐이에요!”

“말 똑바로 해야지. 가져간 거라니? 뺏어갔잖아. 그게 예의 없는 거 아니야?”

“아저씨 눈치 없어요?”

“둘 다 조용.”

 

두 사람이 고개를 푹 숙이자, 요헤이는 한숨을 쉬며 차를 마셨다.

 

“망토의 얼룩 제거제를 타타 할아버지께 받고, 대가로 촌장님께 물건을 건네주면서 보급품을 받다가 다시 하나미치를 만났다고.”

“…마을 현황과 제일 급한 물자가 무엇인지 이야기 나누고 있었어. 중앙에 보고는 해야 하니까.”

“근데 저 아저씨가 갑자기 망토 뺏어가려고 했어요.”

“뺏다니! 확인만 하려고 했을 뿐이야! 그거 한 번만 보여주면 됐는데!”

“그렇다고 뒤에서 확 잡아요? 손목 잘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하세요.”

“어차피 안 찌를 거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안 피한 거라고. 쪼끄만한 게 진짜.”

“크다고 자랑해요?”

“그만.”

​

요헤이의 말에 두 사람은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미치도, 미오도 알고 있다. 지금 요헤이는 기분이 좋지 않다. 오랜 친구가 딸을 울렸고, 자신은 그를 상처입혔다. 게다가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눈 밑에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하─.”

 

그럼에도 요헤이는 자신의 집으로 하나미치를 데려왔다. 그 과정에서 미오는 무언가 불만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아버지의 결정을 반박하진 않았다.

요헤이는 조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했다.

 

“미오, 일단 그 망토는 하나미치꺼 맞아. 옛날에 아빠가 마을에 오기 전에, …받은 거야. 그래도 아빠 생각해 줘서 고마워. 얼룩은 신경 못 썼는데. 역시 우리 딸이 최고네.”

 

요헤이의 칭찬에 미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하나미치, 오랜만에 봤는데 상처를 입혀서 미안해. 멈추려고 했는데 잘되지 않았어.”

“와하핫!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닌데 뭘!”

 

요헤이는 엷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하나미치.”

“응?”

“미오에게 사과해 줘. 내 딸에게 험하게 행동한 것 말이야.”

“흐눗.”

 

하나미치는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미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

“…미안하다.”

“미오, 너도 아빠 친구에게 사과해 줘. 아빠가 항상 너에게 뭐라 당부했는지 기억해.”

 

어른에게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 미오는 하나미치가 내민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자, 우리 모두 사과했고, 사과를 받아들였으니 이제 이 일은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기야.”

​

요헤이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옆에 걸린 투구와 검을 챙기며 자신만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당부한다.

“그럼 나는 순찰하고 올 테니 미오, 저녁 준비해 줄래?”

“네!”

 

씩씩하게 답하며 일어난 미오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하나미치는 당황한 듯 자신도 일어나 요헤이의 옆에 선다.

 

“나도 같이 갈래.”

“…하나미치, 넌 부상 입었잖아.”

“칼에 베인 것도 아닌데! 아무렇지도 않아.”

“금방 다녀올게. 요즘은 마물이 출몰하는 때가 아니라서 그냥 가볍게 둘러보고 올 거야.”

“누웃.”

“그럼 다녀올게.”

 

요헤이가 나간 후, 하나미치는 좀처럼 자신이 머무를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요헤이가 없는, 이 낯선 집에서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몰라 한참 문 앞에서 서 있었다.

 

“아저씨.”

 

하나미치가 뒤돌아보자, 미오는 선반에 잘 말린 무잎이 담긴 바구니를 그에게 보인다.

 

“다치셨어도 채소 다듬기는 하실 수 있죠?”

“…당연하지.”

“그럼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아버지가 오셨을 때 바로 식사 차려드리고 싶어요.”

 

하나미치는 우물쭈물 다가가 바구니를 받았다. 어색하게 앉아 있는 것보단,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더 낫다.

 

“뭐 만들 건데?”

“된장국이요.”

 

하나미치는 잘 말린 무잎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자른 무잎은 밖의 우물에서 퍼온 물을 담아둔 사기에 풀어두고, 미오가 직접 만들었다는 두부를 예쁜 네모 모양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미오는 두 개의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한쪽에는 쌀을, 한쪽에는 된장을 풀고 불을 피운다. 불길이 안정될 때까지 살피던 미오는 톡, 말을 뱉었다.

 

“아저씨는. 아빠랑 친해요?”

“눗! 당연하지. 요헤랑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 요헤가 내 이야기 안 했어?”

“전혀요.”

“……그렇구나.”

 

두부를 자르는 칼질에 점점 힘이 실린다. 불길이 안정되자 미오는 달걀을 꺼내 껍데기를 깨고, 흰자와 노른자가 고루 섞이게 젓는다.

 

“아빠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요?”

“어떤 아이? 그냥 평범했나? 요헤가 말 안 해줬어?”

 

미오는 냄비 곁에 철판을 올려 불에 달궈질 때까지 기다리며 답한다.

 

“안 여쭤봤어요.”

“그래? 우리 되게 재미있는 일들 많았거든. 나 말고도 친구들 3명 있는데 말이야. 사쿠라기 군단이라고 불렸어.”

“사쿠라기? 아저씨가 대장이었어요?”

 

하나미치는 다 자른 두부를 한쪽에 밀어 넣고 미오가 내민 말린 생선을 받아 기름을 구석구석 바른다.

 

“사쿠라기 군단이라 내가 대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실은 요헤이가 대장이었다고 생각해. 거리에서 시비 거는 놈들은 다 패고 다녔거든.”

“…아빠가 패싸움했다구요?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우리 마을에서 요헤이를 싸움으로 이긴 사람이 없었다니까.”

“우와.”

“엄청 재미있었지. 냇가에서 물고기 잡아서 구워 먹거나, 마을에서 행패 부리는 귀족 나리들 돈주머니 훔치기도 하고. 마을에서 제일 높은 집 지붕 위로 올라가서 놀다가 떨어져서 팔도 부러졌었고. 술집 뒷방에서 바쿠치로 돈 딴 적도 있다? 뭐어, 잃었을 때가 더 많긴 했지만.”

 

기름을 잔뜩 먹인 생선을 잠시 접시에 내려놓은 하나미치는 그 시절 생각이 났는지 미소를 짓는다.

 

“어린 애들이 돈을 땄으니, 그곳을 관리하는 건달이랑 꾼들이 얼마나 맘에 안 들었겠어. 돈 딴 날에는 돈 뺏으려는 건달이랑 싸우기도 했지. 그러다가 점점 저 어린애들이 주먹 좀 쓴다고 좀 유명해지니 중앙에서 온 군인이 우리 데려갔어. 배곯게 안 할 테니 군에 들어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갔지. 우리 그때 되게 배고팠거든.”

“그게 몇 살 때예요?”

“어, 한 15살인가?”

“나랑 같은 나이 때잖아요?!”

 

미오는 계란지단을 굴려 돌돌 만 후, 나무 접시에 톡 놓았다. 그 위에 하나미치가 기름을 먹인 건 생선을 올려놓았다.

 

“신기해요. 아빠가 그랬다니.”

“재미있지? 요헤이에게 이야기해 달라고 하지 그랬어.”

“아, 그냥, 뭔가. 음.”

 

미오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빠는, 본인 이야기는 잘 안 하셔서. 그러니까, 아니, 음. 내가, 아빠. 친딸이 아니라서… 이야기를 안 해주시는 걸 수도 있잖아요.”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미오는 구워지는 생선을 살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요헤이는 미오가 13살이 되던 때에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요헤이에게 전부 들었다고 했다.

젖먹이였던 미오를 데리고 와서 어떻게 키웠는지는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가끔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주 조각난 이야기들을 들려주실 때가 있었다.

젖이 없어 배고파 우는 미오에게 소를 키우는 할아버지에게 빌어 우유를 끓여 먹인 요헤이, 그마저도 없으면 쌀죽을 아주 묽고 곱게 갈아 먹이고 탈이 나지 않을까 밤새 미오를 살피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촌장님 댁으로, 마을의 할머니들에게 달려갔던 요헤이. 잠을 못 자서 마을 회의 중 촌장님 앞에서 이마를 대고 그대로 코 골며 잠든 날.

그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고 애정을 쏟으며 자신을 키웠다는 어른들의 말씀과 함께 마을에 도착한 직후부터 싸움에 미친 사람처럼 마물 피를 뒤집어쓰고 다녔던 자가 미오를 만나 사람이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미오가 귀신이었던 요헤이를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귀신 같았던 요헤이가 없었다면 갓난아기였던 미오는 진작에 마물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빚을 졌어요.”

“빚~?”

 

어느새 다 구워진 생선을 접시 위에 올리고, 미오는 끓는 장국에 두부와 무잎을 넣는다. 하나미치는 부엌을 정리했다.

 

“꼬맹이가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그리고 보통은 그런 걸 빚이라고 하지 않아.”

 

지 아빠랑 똑같네. 하나미치는 쯧, 혀를 찬다.

무언가의 기억이 떠오른 듯 미간을 잔뜩 구긴 얼굴은 험상궂지만, 미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노릇하게 구워지는 생선을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아빠만 이 먼 북쪽까지 온 거예요? 사쿠라기 군단은요?”

 

하나미치는 정리가 다 된 부엌을 뒤로 하고 쌀이 익는 중인 냄비의 나무 뚜껑을 살피며 성실히 답했다.

 

“전쟁 중에 크게 다쳐서 의료원에 있었을 때 요헤이가 전출을 자원했다고 들었어.”

 

미오는 그의 말에 요헤이의 상체에 무수히 죽죽 그어진 크고 작은 흉터들을 떠올렸다. 보기 흉하다며 요헤이는 미오 앞에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미오는 상관없었다.

살아있기에 흉터가 남은 거니까.

흉터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난 여기 등에 크게 있지. 큰 전투였거든. 둘 다 너덜너덜해져서 겨우 살아남아 의료원에 몇 달을 누워있었어.”

 

하나미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어깨를 으쓱 올린다.

 

“움직일 수 있게 되니 난 전장으로 다시 돌아갔고, 요헤이는 전장을 떠났지. 그 이후 연락이 없었어. 근데 여기 있더라고. 아, 밥 조금만 더 있으면 되겠다.”

“국도 다 된 것 같아요.”

 

달걀, 생선. 북쪽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집에서도 보기 힘든 귀한 재료다. 분명 손님인 하나미치가 왔기에 아낌없이 내놓은 티가 난다. 미오는 볼까지 잔뜩 발갛게 물들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럼, 아저씨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가요?”

“돌아가야지. 보고도 해야 하고.”

“…아빠는 같이 안 가도 돼요?”

 

그 작은 머리통 속의 생각이 훤히 보이기에 하나미치는 킥킥 웃으며 미오의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곳이 집인데 어딜 가겠어. 그리고 요헤이, 이미 여기 온 이후로 퇴직까지 해버렸더라고. 그러니 더 갈 이유가 없지.”

 

부드럽게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하나미치는 딸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순간 문이 열리며 요헤이가 돌아왔다. 손가락 사이사이 파고들었던 붉은 머리칼이 순식간에 파도처럼 빠져나간다.

 

“다녀왔어, 우와. 맛있는 냄새.”

“다녀오셨어요?”

 

요헤이는 자신에게 안기는 미오를 꽉 껴안았다. 늘상 있는 일인 듯 요헤이는 있는 힘껏 미오를 껴안았고, 미오도 까르르 웃는다.

두 부녀의 모습에 하나미치는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다가 집 안 전경을 살핀다. 두 사람이 사는 이 집 여기저기에는 미오가 그린 듯한 그림들이 벽에 붙어있다.

딸이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귀한 종이와 안료를 구해준 아버지 요헤이의 사랑이 보여서.

 

“…뭐야, 누가 봐도 사이좋은 아버지와 딸이잖아.”

 

하나미치는 조금 부러웠다.

미오는 요헤이의 투구와 검을 받으며 말했다.

 

“아저씨도 도와주셨어요.”

“으응? 하나미치도? 고생했네. 고마워.”

 

하나미치가 팔을 활짝 벌리자, 요헤이는 고개를 갸웃한다. 으응?

 

“왜, 하나미치? 뭐 해? 얼른 밥 먹자.”

“……응.”

 

식사하며 하나미치는 말했다.

석 달.

석 달 동안 마을에 있으며 현황을 조사 후 중앙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래서 그동안 요헤이의 집에 묵어도 되냐고 물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요헤이는 잠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미오를 바라본다.

 

“음.”

 

티를 내지 않았으나 하나미치는 순간 낯선 요헤이를 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부탁했을 때 그가 고민했었던가. 예전부터 그저 웃으면서 ‘좋아’라고 대답했던 요헤이다.

 

“아빠 친구가 돌아갈 때까지만 우리 집에서 잠시 묵어도 될까?”

“저는 상관은 없는데, 아저씬 어디서 주무시게요? 저희 빈방이 없는데.”

 

부녀의 시선이 하나미치를 향한다. 하나미치는 생선의 뼈와 살을 깔끔하게 분리해서 요헤이와 미오의 밥 위에 올려주며 답했다.

 

“그냥 베개만 주면 알아서 잘게.”

“뭐? 하나미치, 허리는? 바닥에서 그냥 자면 어떡해?”

 

그 순간만큼은 옛날의 요헤이 같아 하나미치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허리는 진작에 다 나았지. 너처럼 흉터는 남았지만. 이제 괜찮아.”

 

쓰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잘라 요헤이와 미오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 저녁 식사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하나미치는 잘 먹었다고 말하며 그릇 정리는 자신이 한다고 했고 이 과정에서 요헤이와 조금 실랑이를 했다.

하나미치, 너는 손님이잖아! 외쳤을 때 하나미치의 입이 삐죽 나오는 것을 본 요헤이가 결국 같이하자고 말함으로써 작은 소란이 끝났다.

미오는 일찍 자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이제 부엌에는 하나미치와 요헤이가 그릇을 정리한다. 물에 담가 놓은 그릇들을 하나씩 집어 수세미로 쓱쓱 닦아 요헤이에게 건네주던 하나미치는 건네주는 그릇과 함께 말까지 건넨다.

 

“왜 그랬어?”

 

그릇과 함께 말을 받은 요헤이는 하얀 무명천에 그릇을 닦는다.

 

“대답도 안 하고 그냥 그렇게 가버리고.”

 

건네주는 젖은 그릇에 힘이 담긴다.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 편지도 못 썼어.”

“……나도 놀랐어.”

 

그릇을 다 닦고도 건네는 그릇이 없어서 그제야 고개를 들고 하나미치를 봤을 때, 요헤이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더러운 그릇들이 담긴 물속에 손을 그대로 넣은 채 하나미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 삐죽 나온 입을 보니 이제 사춘기가 온 미오가 토라졌을 때의 얼굴과 비슷하여서. 요헤이는 물속의 하나미치 손을 건져 무명천으로 닦아준다. 하나미치는 그 손길에 인상이 구겨진다.

 

“겨우 떨군 놈, 죽지도 않고 여기에서까지 얼굴을 보여서 놀랐어?”

“…하나미치.”

“네 딸이 옆에 없었다면 네 얼굴을 먼저 후려쳤을 거야.”

“그래?”

“그래.”

 

물기 없이 말끔히 닦인 커다란 손. 군데군데 크고 작은 흉터와 굳은살 박인 손. 요헤이는 이 손을 좋아했다.

 

“아직 때릴 정이 남아 있었어?”

“그러게, 수락도 거절도 안 하고 사라진 놈에겐 과한 감정이지.”

“하하.”

뾰족한 그 반응조차 기꺼워서 요헤이는 그저 바보같이 웃었다.

하나미치는 그 반응에 더욱 기분이 나빠진 듯 인상이 구겨졌지만.

설거지가 끝난 후 하나미치에게 침구를 준 요헤이는 ‘잘 자’라는 말과 함께 침실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요헤이의 손목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하나미치, 나 정말 피곤한데.”

“시끄러.”

 

집 앞에는 거대하게 쌓아 놓은 장작에 불이 활활 타올라서 사위(四圍)가 밝다. 하나미치는 요헤이의 손목을 잡은 채 불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요헤이도 이 정도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별말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자겠다는 사람을 끌고 나온 그 기세치곤, 하나미치는 한참이나 말없이 타오르는 불만 바라보고 있다. 가뜩이나 수면 부족인데 배도 부르고 불의 열기에 몸이 뜨끈해지니 요헤이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질 때쯤 그의 말이 들려왔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알아?”

 

요헤이는 잠시 눈을 비비며 흐려지는 정신을 최대한 또렷하게 끌어모았다.

 

“…응? 아. 보급품 지급하러 왔다며?”

 

하나미치는 주변에 쌓인 장작을 불 속에 집어넣었다.

여전히, 잘 타오르고 있다.

 

“네가 적었잖아.”

 

요헤이의 고개가 하나미치에게 향한다.

 

“요청서.”

 

요헤이는 종전 선언이 적힌 종이를 확인 후 아야하 촌장을 대신하여 마을에 필요한 물자, 자원, 인력을 달라는 요청서를 작성해 중앙으로 보냈던 적이 있다. 그걸, 봤다는 건가.

 

“우연히 봤어. 누가 봐도 네 글씨라서. 자원했지.”

 

고작 그런 불확실한 것에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지는 것은 여전하다.

 

“…아닐 수도 있었잖아.”

“그래도 확인 안 해보는 것보단 낫지. 그리고 결국 만났잖아.”

“…….”

“난 널 만나서 기뻤어, 요헤이. 그 긴 시간 동안의 원망과 화가 얼굴 한번 봤다고 모두 풀어질 만큼.”

 

너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말과 함께 하나미치는 잡고 있던 요헤이의 손목을 놓았다. 불길을 향하던 그 시선은 거두어지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 안으로 홀로 들어가 버렸다.

하나미치가 집으로 들어간 후에도 요헤이는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저 타오르는 불길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장작을 불 속으로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

 

이제는 기억을 되짚어 보기에도, 흐려질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

오오쿠스, 노마, 타카미야 그리고 하나미치. 사쿠라기 군단.

그리운 이름들이다. 형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요헤이는 자신의 친우들을 아꼈다. 그 애정이 유독 하나미치에겐 좀 크게 쏟아졌지만. 그때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두려워할 것 없는 철없던 시절이었다.

부모 없고 돈 없는,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배부르게 해주겠다는 말에 전쟁터로 나갔다. 아무리 이들이 싸움을 잘했다고 해도 길바닥에서 하던 주먹질 싸움과 칼을 휘두르며 사람을 베는 전투는 다르기에 죽지 않기 위해 죽였다. 그뿐이다.

해가 떨어진 후에도 목숨이 붙어있다면 칼을 쥐었던 두 손에 소금 친 주먹밥이 쥐어졌다. 분명히 배부르게 해준다고 했으면서 치사한 새끼들. 하나미치와 타카미야는 늘 주먹밥을 먹어 치우고도 배가 고픈지 물배를 채우곤 했었다. 하루하루 키가 커지는 하나미치와 원체 많이 먹던 타카미야였다.

다섯은 하나인 듯 전장에서도 함께 다녔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살을 베어낼 때의 촉감이 점점 무감각해질 때 적의 급습으로 군단의 대열이 조각났다. 하나미치의 등이 검날에 베어져 쓰러지고, 오오쿠스는 팔을, 노마는 눈과 뺨에, 타카미야는 복부를. 쓰러지는 친구들을 보호하던 요헤이는 온몸이.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지금껏 쓰러트려 온 이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러다 결국 해가 지고.

이들은 살아남았다.

비록 넝마가 되어버렸을지라도, 어찌 되었든 살아남았다는 것은 중요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소중한 인력이기에 이들은 의료원으로 실려 갔다. 오오쿠스의 팔은 아슬아슬했지만 잘 붙어있고, 타카미야는 뱃살에 지방이 적었다면 내장이 다 나왔을 거라며 웃었다. 눈을 다친 노마도 안구를 비껴간 터라 다행히 시력에 이상은 없었다.

중증은 나머지 두 사람이었다.

허리를 베인 하나미치는 팔과 다리 감각은 있었으나 걷는 것을 힘들어했고, 가장 심하게 다친 요헤이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 요헤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칠 일이 지나있었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내려다보는 친구들의 바보 같은 얼굴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모른다. 특히 하나미치.

의료원은 삼시세끼 밥도 잘 나왔고, 전쟁터와 다른 별천지였다.

하얗고, 소독액 냄새가 나는.

한가지 전장과 비슷한 점이라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것이라는 것뿐.

그나마 부상이 적었던 오오쿠스는 그새 팔 상처를 꿰매주던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며 상처 꿰매는 법을 배우고 있었고, 노마는 다듬어진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의료원의 피 묻은 붕대를 씻어내고 끓는 물에 집어넣어 붕대 소독을 도왔다, 타카미야는 원활한 회복을 이유로 치료소의 식량을 축내다가 취사 담당자가 화가 난 채로 쫓아와 그를 데려갔다. 왜인지 그 후 타카미야는 취사원으로 일을 시작했고, 밥과 반찬의 맛이 좋아졌기에 병동에 있던 환자들의 얼굴까지 좋아졌었지.

그리고 하나미치.

허리의 상처로 움직임이 둔해진 하나미치는 상처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난 후에도 둔해진 감각을 되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따끔따끔한 통증을 기꺼워하면서 말이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게 더 심각한 거래. 하나미치는 땀에 잔뜩 젖은 얼굴로 숨을 돌렸다.

그맘때쯤, 어린 시절 이후로 하나미치와 가장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의료원 의사들은 당장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병사 옆에 붙어있던 터라 하나미치가 요헤이의 상처 실밥을 풀었고, 우글거리는 흉터 위에 연고까지 발라주었다. 뒤틀린 흉터들을 보여주기 싫어 요헤이는 하나미치가 자리를 비웠을 때 자기 손에 닿는 흉터들은 스스로 연고를 발랐는데 그러면 하나미치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왜인지 요헤이는 모른다. 그저 자신의 흉터를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하나미치는 어디론가 가 있다가도 요헤이가 연고를 바를 시간에 귀신같이 나타나 연고를 발라주었다.

산 자의 시간은 흘러간다.

상처가 모두 회복되었고, 전장에 다시 나가야 할 때에. 하나미치가 말했었다.

 

“전쟁이 끝나면 말이야.”

“응?”

“바다라는 곳으로 갈까? 물고기를 가득 잡아서 팔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

“하하, 부자가 되면 좋지.”

“그치? 물고기도 잡고, 밭도 일구다가 배고파지면 밥 먹고 밤새 이야기하며 잠드는 거야.”

“그래, 좋겠네. 하나미치, 좋아하는 아가씨라도 생겼어?”

 

늘 마을 여인들에게 고백했던 하나미치다. 이번에도 혹시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긴 걸까? 요헤이의 말에 아이처럼 뺨을 붉히며 이야기하던 하나미치는 순식간에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듯이.

 

“요헤이랑 같이 살 건데?”

“에?”

“요헤, 전쟁 끝나면 나랑 같이 살자.”

“…무슨 소리야, 시커먼 남자 둘이서 왜 같이 살아? 너 그러다가 혼인 못 한다?”

 

하나미치는 무엇이 불만인지 뚱한 얼굴로 요헤이를 노려보다가 흥! 하면서 가버렸다.

그러다가 요헤이가 전장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

하나미치가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었다.

 

“요헤, 너랑 같이 늙고 싶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이 열렬한 사랑 고백이라는 것쯤은 요헤이도 알았다.

 

“…….”

 

그랬었지.

아주 오래전이고 젊었다. 참, 젊었어.

눈앞이 온통 붉다. 불꽃은 여전히 맹렬하게 타오르고, 오랜만에 묵은 기억을 꺼내어 짚어보던 요헤이는 한숨을 내쉰다.

집으로 들어가자, 요를 피고 바닥에 누워 잠든 하나미치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요를 깔았다지만, 두껍지 않아 허리가 베길 텐데. 물론 땅바닥보단 낫다지만….

피곤했는지 머리맡에 요헤이가 앉아도 하나미치는 깨지 않는다.

손끝에 닿는 머리칼은 자신의 딸과 다르게 억세고 거친 느낌이지만 요헤이는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아주 오래전에는 자주 이렇게 하나미치의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그리운 날들이다.

 

“하나미치, 나는 말이야. 그저.”

 

요헤이는 손길을 거두며 미소 지었다.

 

“너는 가장 좋은 것들만 가지길 바랐어.”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나를 왜 원한다는 것인지.

거절은 당연했다.

다만 요헤이는 확실히 말하지 않았다. 그럴 용기가 없었고, 자신이 무엇이라고 그를 거절하나. 그저 답하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 순간 또한 흐무러져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요헤이가 전장을 떠나는 날. 전장으로 나가는 하나미치가 자신의 망토를 벗어 요헤이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그는 말했다.

대답을 기다릴 테니 꼭 편지하라고. 자리를 잡는다면 꼭 편지 써 달라고.

 

“그러니까, 이거 가져가. 날 잊지 마. 요헤이. 똑똑히 기억해! 나도 널 기억할 테니까.”

 

요헤이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

​

 

 

 

 

 

사쿠라기 아저씨가 온 지 한 달이 흘렀습니다.

아저씨는 아빠와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 주변을 돌고, 아야하 촌장님과 이야기하거나 마을 어른들을 만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일찍 주무십니다. 정말 일찍 주무세요. 아빠가 밤 순찰을 나가려 준비하실 때 이미 바닥에 요를 펼치고 누우십니다.

낮에 곤란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마을 주민들은 촌장님이나 아빠를 찾아오셨는데, 사쿠라기 아저씨가 이 마을에 온 뒤로 조용합니다. 아마 아저씨가 다 정리하시는 거겠죠. 덕분에 아빠의 수면이 방해받지 않아 좋긴 한데….

 

“왜 표정이 그래?”

“…제 표정이 왜요?”

​

아저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리저리 내 얼굴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내 볼을 쿡 찌릅니다.

​

“이거, 이거. 요헤이가 불만이 있을 때 얼굴인데.”

“아닌데요.”

“…진짜 지 아빠랑 똑같네. 크흠! 아무튼, 잠깐 물어볼 게 있어.”

 

…이 아저씨. 아빠가 주무실 때면 나에게 와서 아빠가 좋아하는 게 뭐냐며 묻습니다. 처음에는 성실히 대답해 드렸습니다. 어찌 되었든 아빠의 친우분이시니까요.

서책, 깔끔한 옷, 날이 잘 든 검, 머리에 바르는 식물 기름. 사쿠라기 아저씨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적더니 고맙다며 와하하! 웃습니다. 그리곤 아빠가 일어나면 꼭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병아리는 삐약거리고, 사쿠라기 아저씨는 ‘요헤!’ 거리죠. 그 모습이, 아무리 봐도.

 

“내가 이상한 건가? 그 아저씨가 우리 아빠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

“에─. 진짜?”

 

한참 쇠를 두드리던 유우는 내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붉게 달궈진 쇠의 형태를 살피다가 물속에 담가버렸습니다. 피어오르는 엄청난 수증기를 헤치고 유우가 땀을 닦으며 나옵니다.

 

“사쿠라기 아저씨가? 미토 아저씨를?”

“아무리 생각해도.”

“아─.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사쿠라기 아저씨가 미토 아저씨 쓰는 무기들 가져와서 전~부 날을 갈아달라고 했었어. 새것처럼 해달라면서 옆에서 어찌나 닦달하시던지.”

“굳이? 아빠도 평소에 관리하시는데.”

“나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래도 대장간에서 한 번 더 벼려달라고 하셔서.”

“뭐어. 무기는 날카로울수록 좋긴 하지. 유우 네가 워낙 잘하니까.”

“뭐야, 갑자기 칭찬? 고맙습니다.”

 

유우는 과장되게 손을 휘저으며 허리를 숙입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다가 겨우 붓을 휘둘러 마지막으로 색을 채워 유우에게 건넵니다.

 

“자!”

“진짜 잘 그렸다! 내가 이래?”

 

유우는 두 눈을 반짝이며 종이에 그려진 자기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 순간이 나는 제일 좋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이 기쁨이 되는 순간을. 바로 이 순간 때문에 나는 붓을 계속 쥐는 것이겠죠.

 

“고마워! 가보로 간직할게!”

“에? 뭐야 뭐야? 그 정도까지?”

“당연하지! 이제 이게 내 보물 1호야!”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유우는 참으로, 참으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숨기지 않아서. 괜스레 나까지 부끄러워집니다.

나는 안료가 든 병들을 가방에 넣고 물에 씻은 붓을 챙겨 대장간을 나왔습니다. 아빠는 아마 이 시간이면 일어나셨을 테고, 분명 사쿠라기 아저씨는 아빠 옆에 붙어 따라다니겠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쿠라기 아저씨보다 더 이상한 것은 아빠입니다. 보통은, 싫지 않은가? 덩치 산만한 남자가 졸졸 따라다니는데도 마치 병아리 보듯, 아무렇지 않아 하십니다.

아니, 가끔 보면 기분까지 좋아 보이시니.

도대체 뭘까요.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습니다. 얼른 돌아가야겠다고 하는데 마을 입구 쪽이 뭔가 시끄럽습니다.

또 뭐인가 하고 보니 남루한 차림의 낯선 무리가 아야하 촌장님과 이야기 중입니다.

확실히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니 마을에 새로운 이방인들이 보입니다. 상인들도 이 북쪽까지 오는 날도 있었고, 무엇보다 마을에 자리 잡는 새로운 이웃들도 생겼습니다. 아이와 노인들밖에 안 남은 우리 마을에서 젊은 인력은 귀합니다. 보아하니 이번에도 이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온 이들인 것 같습니다. 아야하 촌장님은 이방인들을 구경하는 날 보셨는지 손짓하십니다.

 

“미오!”

“네, 촌장님.”

“인사드리렴. 미토 씨 친우분들이시래.”

“예?”

 

순간 번뜩 사쿠라기 아저씨가 했던 옛이야기들이 생각났습니다.

사쿠라기 군단!

나를 소개하는 촌장님의 말씀에 이방인들 역시 당황합니다.

 

“편지 내용이 진짜였네?”

 

머리가 병아리같이 노란 아저씨가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내밉니다.

 

“오오쿠스 유지라고 해. 근데, 진짜 요헤이 딸이라고?”

“네에. 미토 미오입니다.”

“맙소사, 아니 근데. 어? 우와. 그 자식.”

 

뭐지.

오오쿠스 아저씨는 이상한 얼굴로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있습니다. 왜 아빠 친구들은 다 이런 분들이실까요. 체구도 입술도 엄청나게 두툼한 남자가 오오쿠스 아저씨를 멀리 밀어버리곤 혀를 차며 말씀하십니다.

 

“쯧, 타카미야 노조미다. 잘 부탁해. 저놈은 신경 쓰지 마.”

 

콧수염을 만지던 아저씨는 크게 웃더니 타카미야 아저씨와 어깨동무하며 나에게 인사합니다.

 

“노마 츄이치로. 츄─라고 불러도 돼. 잘 부탁해. 근데 멀리서 보면 요헤이 딸이 아니라 하나미치 딸 같은데?”

 

안 그래도 마을에 사쿠라기 아저씨와 함께 있으면 꼭 어른들이 아빠와 딸 같다고 말하는데, 별로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난 미토 요헤이의 딸이라고요.

츄 아저씨의 말에 다른 두 분도 동의하시는지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머리색이 비슷하긴 하네.”

“네 이야기는 하나미치에게 들었어. 그놈이 알려줘서 우리도 여기 온 거거든. 보자, 하나미치 집은 어디야?”

“저희 집에서 묵고 계세요.”

 

오오쿠스 아저씨는 내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십니다.

 

“아─. 그 자식.”

“그럴 줄 알았어. 우리까지 가긴 너무 민폐니까. 촌장님. 이 마을 빈집이 있습니까?”

“빈집이야 많지요.”

“하나미치 녀석. 빈집도 많은데 요헤이 집에서 살고 있다고? 딸도 있는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조용히 속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아저씨들은 짐이 가득 실린 수레를 일단 아야하 촌장님 댁에 놓고 어떻게 하면 아빠를 깜짝 놀라게 해줄까 서로 이야기하며 집으로 빠르게 걸어가셨습니다. 아저씨들 정말 발걸음이 빠르셔서 나는 거의 뜀박질을 하며 집으로 안내했는데 마침 아빠가 마당에 사쿠라기 아저씨와 계시는 게 보입니다.

 

“아! 저기 아빠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저씨들은 모두 아빠에게 달려갑니다.

 

“야!”

“이…!”

“미친 새끼야아아아!”

 

커다란 고함에 놀란 아빠는 순식간에 아저씨들에게 에워싸여 바닥으로 넘어지셨습니다.

 

“어? 뭐야? 너희? 어떻게?”

 

사쿠라기 아저씨가 옆에서 크게 웃으시고, 오오쿠스 아저씨는 눈물을 흘리시며 화를 내셨고, 타카미야 아저씨는 아빠의 볼을 잡고 죽죽 잡아 늘이셨으며, 츄 아저씨는 아빠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헝클어뜨리십니다. 아빠는 그 손길들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굉장하다. 정말 친한 친구구나.

순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15살의 미토 요헤이를 어쩐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

​

​

​

​

​

​

​─

​

​

​

​

​

​

​

마을에 정착한 아저씨들은 빠르게 이 마을에 스며드셨습니다.

오오쿠스 아저씨는 무려 의술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전쟁 때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고, 질병은 잘 모르지만. 특기는 상처 꿰매기를 잘 하신다고 하십니다.

 

“제봉도 꿰매는 건데?”

“에에라! 직물이랑 살은 다르지.”

“그렇긴 하다만. 어디서 그렇게 꿰맸는데?”

 

의심하는 듯한 아빠의 얼굴에 오오쿠스 아저씨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답했었습니다.

 

“장례 치르기 전에 성히 가라고 하다 보니.”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아빠는 다음 질문은 굳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최근에는 병을 다스리기 좋은 약초학을 아야하 촌장님께 배우고 계세요.

타카미야 아저씨는 작은 식당을 여셨습니다. 술까지 담가서 파신다는데 맛이 좋아서 마을 어르신들의 아지트가 되어버렸습니다. 가끔 밀가루나 설탕이 들어오면 아이들에게 과자를 만들어 주시기도 해요.

츄 아저씨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밭을 관리 해주고 농산물을 타카미야 아저씨에게 파는 농부가 되셨습니다. 멋쟁이 콧수염을 쓸면서 타카미야 아저씨에게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 매번 가게 앞에서 언쟁하십니다.

그리고 사쿠라기 아저씨.

사쿠라기 아저씨는 수도로 돌아갔습니다. 분명 석 달쯤 머무르신다고 하셨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는지 마을에 왔을 때보다 훨씬 가벼운 짐만 챙겨 떠나셨습니다.

 

“…….”

 

아빠는 아저씨가 떠난 직후부터 왜인지 넋을 놓고 계신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허전하실까요? 친구분들이 셋이나 곁에 계시는데. 시든 나무처럼 쳐진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럽습니다.

 

“…….”

 

아빠에게는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아저씨가 떠나기 전날 내 방에 방문했었습니다. 아저씨는 항상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거실을 제외하고는 우리 집 안을 돌아다니신 적이 없으십니다.

거침없고 막무가내인 듯했는데, 의외로 이런 거엔 눈치를 보시는 것이 의외였습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는 방문을 닫고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여셨습니다.

 

“내일 나 수도로 돌아가.”

“예? 벌써요?”

 

참으로 갑작스럽게 이 마을에 온 것처럼 이 마을을 떠나십니다. 내 반응에 아저씨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웃으면서 또 머리를 쓰다듬으십니다.

 

“뭐야 꼬맹이. 아쉬워?”

“아뇨? 딱히.”

“누웃. 정 없구먼.”

 

솔직히 사쿠라기 아저씨가 있든 없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아빠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무언가가 아직 안 풀린 것 같았는데. 그건 다 풀고 가는 건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아저씨는 이를 드러내고 웃습니다.

 

“다시 돌아올 거야.”

 

이건 또 의외입니다.

 

“여기로요?”

“그래. 군단 녀석들도 여기 정착했으니, 돌아가면 나도 이제 그만두려고. 슬슬 퇴직해야지.”

“왜 굳이 여기로….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요.”

 

척박한 땅, 들인 노력에 비해 겨우겨우 자라는 작물들, 짧은 여름과 긴 혹독한 겨울. 젊은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오는 걸까요. 내 물음에 아저씨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을 거둡니다. 아니야.

 

“전부가 여기에 있어.”

 

나 같은 애도 지금 저 아저씨의 표정을 보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사쿠라기 아저씨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집니다.

이건, 바보라도 알 수 있습니다. 아, 정말로.

 

“아저씨 우리 아빠 좋아해요?”

 

사쿠라기 아저씨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는 그 눈을 보았습니다. 어떤 대답은 꼭 말로써 확실히 하지 않아도 됩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아빠가 아깝습니다. 진짜.

 

“잠깐만요.”

 

내 그림을 보관했던 선반의 서랍을 엽니다. 수많은 그림 중 한 장을 집어 아저씨에게 건넸습니다. 선물, 이라고 하기엔 내 마음은 그리 고운 결이 아닌지라 의아한 얼굴인 아저씨에게 톡 쏘아붙입니다.

 

“사탕 값이에요.”

 

내가 제일 잘 그렸다고 생각하는 우리 아빠의 초상화입니다.

북쪽의 짧은 여름날, 활짝 웃고 있는 아빠의 모습. 진짜 아끼는 건데….

사쿠라기 아저씨는 두 눈을 반짝이며 종이에 그려진 아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나는 순간 유우에게 그림을 그려 주었던 순간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이 기쁨이 되는 순간.

 

“……고마워.”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아아. 사랑은 정말 지켜보는 사람까지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듭니다.

 

“…….”

 

상념에서 깨어나 다시 아빠를 바라보니 계속 저리 둔다면 숫돌에 칼날이 아니라 손톱까지 갈 것 같았습니다. 아빠, 아빠. 외침에도 아빠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으십니다. 뭘 그리 생각하시는지. 사쿠라기 아저씨일까요. 결국 옆으로 다가가 살짝 아빠의 손등을 칩니다.

 

“아빠. 다치시겠어요.”

“응?”

 

조금만 더 늦었다면 손톱이 갈려 피가 났을 겁니다. 아빠는 머쓱하게 웃으시며 무기들을 정리하십니다.

나는 가만히 정리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아빠 앞에 섰습니다.

발색이 강한 붉은색 안료는 구하기 힘든데, 덕분에 다 써버렸습니다. 나중에 아저씨가 돌아오면 사탕 더 달라고 해야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아빠에게 초상화를 내밀었습니다.

 

“실물보다 낫죠?”

“…….”

 

아빠는 잠시 내가 내민 그림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리시며 나를 안아주셨습니다.

 

아빠, 정말 그 아저씨 좋아해요?

완전 아빠가 아까운 거 알아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15년 동안 아빠 옆에 있었지만, 그 아저씨가 있었던 날들 속에서 아빠가 편안함을 느끼시는 게 보였어요.

아빠는 생각보다 보는 눈이 낮네요.

그래도 아빠가 누구를 좋아하든 상관없는데, 그냥 아빠가 제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이 혀 안에서 맴돕니다.

때로는 말보다 그저 침묵이 더 낫기에 나는 그저 아빠를 더 꽉 안을 뿐입니다.

 

사쿠라기 아저씨는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북쪽의 이 긴 겨울도 끝나가고 곧 봄이 오니까요.

bottom of page